◇ 시인과 시(현대)

이생진 시인 / 동백꽃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13:26

이생진 시인 / 동백꽃

 

섬에는 어딜가나 동백이 있다

동백이 없는 섬은

동백을 심어야지

동백은 섬을 지키기에

땀을 흘렸다

동백은 바위에 뿌리박기에

못이 박혔다

동백은 고독이 몰려와도

울지 않았다

 

 


 

 

이생진 시인 / 물새에게 쓰고 싶은 편지

 

물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물에 지워지지 않는 연필로 쓰고 싶다

집배원은 정직하니까

꼭 물새에게 전하리라

나는 집배원이 고마웠고

우체국엔 늘 편지가 쌓여 있어 좋다

새파란 물새의 우표를 붙이면

물새는 제 초상화로 복T지

우체국장은 거만하지 않고

우체국 아가씨는 유니폼만큼이나 헌신적이다

물새도 그 편지를 받으면 기뻐하겠다

물새들은 온종일 시를 찾아다니는 것 같아서

바닷가에 앉으면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이생진 시인 / 바다의 오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이생진 시인 / 미친 사람들

- 마라도 15

 

 

마라도에 오면 왜 미치는가

김영갑은 마라도에 미쳐

결혼을 포기했고

서울을 포기했고

고향을 포기하고

파도만 쫒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이번엔 사진기가 바다에 미쳐

마라도를 떠나지 않는다

밤엔 마라도 전체가 미쳐 깜깜한 하늘에 뜬 별

발 밑은 모두 위험한 절벽인데

밤에도 미쳐 헤맨다는 것은

여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서울 어느 골목에 이런 유괴가 있을까

마라도에서는 서울보다 하늘이 가깝고

희망보다 절벽이 가까워서 꿈이 많다

하늘로 가고 싶은 꿈이 많다

 

* 김영갑: 사진작가, 사진집 <마라도> 1995

 

 


 

 

이생진 시인 / 시인의 날개

- 마라도 10

 

 

조물주가 시인을 만들었다면

시인의 언어에만 날개를 달지 말고

시인의 양쪽 죽지에도

날개를 달아줄 일이지

그땐 새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겠는데

섬에 오면 정말 날개를 달고 싶다

 

 


 

 

이생진 시인 / 아내 모르게

- 마라도 12

 

 

아내 모르게 하는 소리인데

나는 이런 데 오면

엉겅퀴가

패랭이가

민들레가

갯쑥부쟁이가 좋아 아내를 잊는다

 

또 아내 모르게 하는 소리인데

용암석에 부딪치는 파도며

뿌옇게 드러낸 톳과 가사리를 보면

아내를 잊는다

 

 


 

이생진(李生珍) 시인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국제대학 영문과. 1965~1969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산토끼> <바다에 오는 이유>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섬에 오는 이유>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혼자 사는 어머니> <서귀포 70리길> 등 시집 31권, 수필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물고기> 등. 윤동주문학상, 2002.상화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