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정분 시인 / 오랑캐꽃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13:31

허정분 시인 / 오랑캐꽃

 

 

바람벽 묵은 거미줄에 걸린 햇살이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이다

마루 끝에 마른 낙엽 한 장 팔랑거리며

적막을 거느린 찢어진 문풍지 사이

성긴 기억의 신음을 끌고 나온 할매

굽은 등에서 미동도 없는 봄볕이

그림자놀이를 하는 집

 

죽은 할아비 십여 년 머슴 새경으로

장만한 산비탈 가파른 땅 바라보며

짓무른 눈매 훔치는 삼월 삼짇날

감자밭 매던 호미 던지고

봄바람 따라간 과부 며느리

종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댓돌아래 오랑캐꽃 몇 포기 자글자글

햇볕에 끓고 있는 외딴집

 

-시집 <바람이 해독한 세상의 연대기> (2021, 시산맥)

 

 


 

 

허정분 시인 / 눈물의 형이하학

 

 

온 천지간을 하얀 무명으로 덮었던 설국이

따듯한 햇살의 투영으로 맥없이 추락한다

 

정월 마지막 날

한 뼘 쌓아 올렸던 흰 혼백의 염원이

양지바른 추녀에서 물거품으로 환원되는

고통은 눈물이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뼈를 세웠던 결기들이

다시 소지가 되어 허공중으로 분해되는

저 불변의 과정에

누가 공양을 올렸는지 점 점 찍힌 상형문자

탁본 뜨듯 풀어 논 먹물이 깊다

 

검은 상복을 입은 호두나무 가지에서

재잘재잘 한 생애를 탁발하는 참새무리

은유의 숨결이 겨울을 견딘 우듬지에 닿는데

타악! 비명을 지르며 눈꽃 한 무더기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부신 자폭!

저 멀리 전염병이 도는지 날 선 샛바람이 분다

 

 


 

 

허정분 시인 / 느티나무 뒤주

 

 

어른들 손때가 묻어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던 쌀뒤주를

육촌 형님이 우리 집 아궁이 땔감용으로 주셨다

뿌옇게 먼지 쓴 하 세월의 부질없음이

겹겹이 쌓인 몸피 쌀 두 가마쯤은

너끈히 품었을 텅 빈 뒤주 안

얼룩진 창호 벽을 노린재 두 마리 유영중이다

시숙님 어릴 때 솜씨 좋은 할아버지가

아름드리 느티나무 베어다 직접 짜셨다는 뒤주

한 가족의 호구지책에 기꺼이 몸 바친 나이테가

한 줌 다비식으로 열반에 들 운명이다

오래 전 두랭이 댁으로 불린

퇴락한 양반가문 대청마루에서

달그락 자물쇠 열리면

아이들이 뼈를 세우던 전성기

배부른 노래에 신주처럼 위하던 대접도 있었지만

꼭 닫힌 수 십 년의 적막강산, 침묵으로 깔려있어

한 겹 바람조차 통과를 거부하는 밀봉의 사연들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불멸의 궤적으로 읽고 있다

 

- 시집 『울음소리가 희망이다』 (고요아침, 2014)

 

 


 

 

허정분 시인 / 내 귀에 이명이 오셨다

 

 

뉘신지 모르는데 양쪽 귀에 누군가 오셨다

해독이 안 되는 작은 소리가

귀청을 맴도는 뚱딴지

두어 군데 병원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불청객이 진을 친 귀가 갑갑하지만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

좋은 말만 들으라는 남의 흉보지 말라는

내 몸의 계시라고 생각하니 무심해진다

기왕에 오셨으니 한 시절

잘 놀다 가시라고 내버려 두리라

통할지도 몰라 꼬박꼬박 올리는 알약들 드시고

떠날 때가 되면 소리 없이 가시겠지

불통도 먹통도 때로는 부처님 말씀이시다

 

 


 

 

허정분 시인 / 민달팽이

 

 

마룻바닥에 뒹구는 둥근 대접 모서리에

잿빛 문양이 붙어있다 자세히 보니

아기 눈썹만 한 민달팽이 한 마리가

느릿 느릿

잘못 든 생의 길을 오체투지로 밀고 간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마른 그릇 가장자리를

뿔 두개로 밀고 간 눈물겨운 노역에

손금처럼 말라버린 몸피가 아사 직전이다

살기 위해 끌고 온 길이 돌고 도는 고행이었다니,

상추 잎에 얹어서 풀밭에 놓아 준다

죽든 살든 운명이다

 

 


 

 

허정분 시인 / 아기별이 뜨는구나

 

무슨 소용이겠냐 애기야,

네가 하늘나라 천사로 떠난 지 오늘로 49일이란다

보고 싶고 보고 싶어 시도 때도 없이 흘린 눈물

아직도 내 등에는 네가 업혀있는데

야속한 시간은 속절없구나

부질없어 넋 놓은 할미 대신 너의 외할머니

가엾은 어린 영혼 극락세계에 들라고

큰돈 내놓으시고 부처님 앞에서 사십구재를 모신다

봄꽃이 피었다 지고 지상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너는 영원히 노란 민들레꽃처럼 웃는데

망자들 혼백 모신 절 마당에는 슬픔 같은 적막이

먼 먼 하늘나라 아기별을 배웅하는 상현달로 떠 있구나

몇 번이나 이 절로 너를 보러 오려나

이승의 관습이 망자에 대한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예우라면

개미 한 마리 죽여 본 일 없는 우리 아기

어여쁜 천사로 하늘을 날겠구나

우리 집 지붕 위에 조그만 여린 별 하나 뜨겠구나

부디 좋은 곳으로 잘 가거라

사랑하는 애기야

 

 


 

 

허정분 시인 / 십대

 

 

어린 시절에도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 쌀독엔 곰팡이가 피었다

엄마는 읍내 싸전 하는 당숙네로 가끔씩 나를 보냈다

-또 외상이냐 다신 외상쌀 가지러 오지 말거라

당숙모 입과 눈에서 번뜩이는 비수 오금이 저렸다

성긴 눈발은 자주 홑겹의 몸을 얼렸다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노래가 현실이 된다면 흰 죽사발 가득 고봉으로 얹힌 떡 마른 침을 삼켰다.

봄꽃이 지고 오래된 농담처럼 입하나 덜겠다던 아버지가 산으로 가셨다

지병을 만장처럼 앞세운 불혹의 나이셨다

꺼이꺼이 곡소리 장단을 맞추는 오라비와

상여꾼 틈에서 오줌을 갈기는 동생도 미웠다

아버지 생전에도 철천지원수와 산다던 어머닌

부뚜막을 헐고 노구솥을 꺼냈다

워낭을 매단 소달구지가 낡은 이불과 그릇 몇 개를 허름한 초가 행낭채에 부렸다

날품 팔러간 들판 개망초 흰꽃이 옥양목처럼 펄럭였다

밤이면 반딧불이 허공을 선회했고 섬광을 그으며 유성별이 떨어져 내렸다

산자락 소나무 켜켜이 쌓아가는 흰 눈의 무게에

생살을 찢는 그 겨울 첫 달거리를 했다.

덧없이 미래에 기댄 까마득한 날이 흘러 흘러갔다

 

 


 

 

허정분 시인 / 코로나 시대의 격문

 

 

아무도 몰랐다 누군지도 모른다 그대가

전해주는 비말의 분자 침방을 그게

당신을 경계해야 하는 불신의 주역이 되는 것을

지구별에 전파하는 이웃나라 통신들도

창궐하는 괴물에 속수무책 포로로 잡혔다는 전언이다.

 

아무도 믿지 마라 노약자일수록 방심은 주검이다.

가족은 가장 좋은 전염의 동반자

몸의 거리는 멀게 마음의 거리는 가깝게

복면마스크 거리두기가 예방인 현실에서

당신도 애인도 일상이 따로 없다.

 

그리운 인연도 익숙한 습관도

잠시 내려놓고 돌아보는 여유를 갖자

인간이 역병을 역병이 인간을

서로 볼모로 잡는 끔찍한 4차원의 재앙

 

그 재앙이 방증하는 문명의 경종에

자연에게 우리 모두 겸허히 참회하자

 

 


 

허정분 시인

1952년 강원도 홍천 출생. 1996년 계간 열린문학 겨울호 등단. 시집 <벌열미 사람들> <우리 집  마당은 누가 주인일까> <울음소리가 희망이다> <아기별과 할미꽃> <바람이 해독한 세상의 연대기>. 너른고을 문학 회원. 민족 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