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원 시인 / 산에서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8. 15:31

최원 시인 / 산에서

 

 

산입山入에 들어서면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

물이 넉넉한 계곡길

소슬바람에 등이 밀리는 오솔길

칼바람에 볼을 찢는 능선길

높낮이를 짚고 올라선다

혈관 속에 머무는 긴 피로

그 안에

산에 사계四季가 있듯이

나의 사계가 쉴 새 없이 흐른다

바람에 몸서리치며

뚝뚝 떨어지는 떡갈잎 한 장

쭈그러진 사연에

우욱 쉰소리로 솔잎들이 울어댄다

곧 이마가 서늘하다

숨차게 내려서는 협곡에서

마침내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산이 주저앉아

쓸쓸한 하산을 자꾸만 막아선다

 

 


 

 

최원 시인 / 또 다른 어느 날

 

 

사람들아

힘들어도 고개를 숙이지 마라

 

꿈이 있으면 꽃이 핀다

 

꿀을 나누어 주고

열매를 익히려고 꽃이 피어난다

 

긴 밤을 참아내고

비바람도 이겨내는

아름다운 꿈

 

오늘 힘들어도

또 다른 어느 날에

하늘은

눈부시게 찬란한 햇빛으로

꽃을 피운다

 

 


 

 

최원 시인 / 위도우

 

 

 임창정의 배역들을 사랑했네 어디서 좀 놀았었냐 씨발라마 지껄이다 따귀를 얻어맞는 장면 헐렁한 면바지 주머니에 양손 깊숙이 집어넣고 커다란 꽃무늬 프린트 셔츠를 입었네 껌을 두 개씩 씹거나 담배를 한쪽으로 비껴 무는 건 나만의 디테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가늘고 둥근 선의 저변에서 웃긴 건 웃긴 거다 슬픈 건 슬픈 거다 그리운 건 멀리 있고 멀리 있는 건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어찌 그다지도 아름다운가 남의 손에 들린 꽃다발은 왜 이렇게 향기로운가 오늘 본 여인은 아름답다 나에게서 떨어져 치마 깃만 나풀거린다 내가 사랑했던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과거는 슬프고 미래는 암담하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담배는 작가의 현재다 나는 미래가 없고 사타구니 안쪽에 소문만 무성하다 뒤집힌 주머니에서 먼지가 흘러내린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알면서 알고 있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으므로 오늘 본 여인은 아름다웠지만 향기로웠지만 우리는 나뭇가지에 충돌하는 봄 햇살처럼 파랗게 웃으며 안녕을 고하고는 먼저 돌아서는 것 이따금 뒤돌아보는 것 우우우우 흐미를 부르며 뒷모습에 익숙해지는 것

 

 그리하여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네 옆모습만 보네 흘깃흘깃 떠 있는 술잔 속의 당신에게도 부끄러워하네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네 나는 뿔이 크게 자란 붉은 사슴처럼 우두커니 있네 길고 얇고 부드러운 바람이 먼 바다로부터 불어와 당신의 치마를 부풀리네 부풀리고 있네 한 손에 신발을 벗어 들고 모래 위를 걸어가는 해변의 여인이여 바람이 당신을 건드리네 나는 손을 뻗어 바람을 애무하네 당신을 거쳐 온 바람을 소유하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 바람의 어딘가에는 당신의 지문이 묻어 있겠네 입술이 닿아 있겠네 바람은 당신의 거푸집 나를 깎고 녹이고 구 부려 그 속에 내 몸을 채우고 싶네 당신의 몸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워지고 싶네 두 개의 바람이 하나로 뭉쳐서 폭발하네 비워져 버린 바람의 공간 속으로 어둠이 들어오네 밀려오네 당신을 숨기는 일몰의 커튼 밖에서

 

 


 

최원 시인

1974년 충남 안면도 출생. 서일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5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저서로 <버선발로 디딘 누룩>(공저)이 있음. 시집 <미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