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채영 시인 / 협상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8. 15:41

이채영 시인 / 협상

 

 

탁자 위에 팔꿈치를 고이고 동굴이 마주 앉아 있다

호우특보가 내려져 있는 표정을 가득 채우고

빈 찻잔에 불발로 그친 납득이 회오리친다

 

찻잔을 바꾸면 호감이 불을 켜들고

한 발 한 발 신경을 곤두세워 속내를 더듬는다

요구가 자라나고 약속도 점점 길어져서

꽃이 되고 산이 되는 교향악을

짜릿하게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느닷없이 깊어진 수갱 앞에서

돌 커튼을 젖히면서 소용돌이치는 귀

지하의 강이 흐르고

수면이 천정에 닿은 곳을 돌아 나오기까지

뜻밖의 위험에 내동댕이쳐진다

 

가라앉는 순간 갑자기 뒤집힌 신뢰가 떠오른다

올라타다가 다시 천정에 부딪혀 공포에 빠져버린다

조급함을 보이지 않는 주도권이

질식 직전 내키지 않는 양보를 망설이지 않는다

양보는 빛이 되어 출구까지의 거리를 측정한다

이제 겨우 말이 트인 동굴이 기진맥진 명분에 빨대를 꽂는다

 

우르르 무너지지 않는다

피로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숨겨진 욕구가 소통의 물보라를 날린다

 

 


 

 

이채영 시인 / 폭설이 지붕에 봉분을 얹는다

 

 

눈가루가 쓴 묘비명을 읽는 이 없는 깊은 밤

장례식도 없이 그는 쪽방에 누워

도시의 가파른 변두리에 묻혀 있다

저린 팔베개로 가위 눌리는 잠 속

세상으로 흘러들지 못한 수만 리 꿈이

차가운 구들장 밑으로 강물이 되어 흐른다

 

지하 막장의 샛강을 지나

몸을 섞은 뒷내 공사장의 내력이

쩡쩡 가래를 뱉어낸다

지붕에 봉분을 얹는 폭설을 뚫고

가난을 대물릴 자식도 없는 그를

밤새워 먼 고향의 하늘로 이장한 아침

온 세상은 만선이다

 

어창이 열리고

어부들 아직 아무도

땅 위에 내리지 않은 첫 장을 열며

가슴 설레는 하늘의 독서에 오독誤讀이 가득하다

 

 


 

 

이채영 시인 / 악기 사러 가는 길

 

 

무궁화 악기점 진열대에 첼로가 서 있다

유리창에 이마를 들이대고

초롱한 눈빛으로 창 밖 거리의 악보를 읽는다

첼로의 느슨한 줄이 내 눈길 쪽으로 당겨지자

도시의 오후가 팽팽해지고

음을 맞추는 소리 붕붕거린다

유리창 안에 어른거리던 노래의 한쪽 문이

열리고 파도치듯 흘러나온

세바스찬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이

가을비에 떨어진 은행잎의 속살 속으로

아득히 젖어든다

생의 한 줄이 끊어진 사람들의

잃어버린 음표가

굵어지는 빗소리에 떠내려간다

부르튼 손가락으로 슬픔을 짚어 가는

얼굴들을 매단 낡은 악상 한 대

신호등에 걸려 주춤거리다

마지막 한 소절을 향해 달려간다

누군가 가슴줄을 뜯고 있을 때

소리를 잃은 관악기들이 목쉰 울음을 꺾어

삼키며 지하에 웅크려 선잠을 잔다.

 

 


 

 

이채영 시인 / 엽총을 어디에 두었더라?

 

 

 노을빛 바다 위를 걸어가는 노인을 만났다 물고기의 뼈 속으로 들어간 헤밍웨이가 내게 총을 겨눈다 탕, 그의 총구가 뿜어낸 실탄이 가슴에 박힌다 까맣게 타버린 청춘의 가슴에

 

 뼈만 남은 나는 낚시 바늘에 시를 끼워 낚싯줄을 드리운다 상어가 놓아버린 물고기를 찾아서 끼니도 거른 채 작살을 날린다

 

 상어와의 결투에서 이기고 상어의 이빨을 훈장처럼 내 잇몸에 끼운다 나를 게걸스레 물어뜯는 상어들, 나는 어디 갔어? 엽총을 어디에 두었더라?

 

 빈 바다에 바람이 바뀌고 나는 다시 배를 띄운다 아직도 작살을 손에 쥔 채 하루 종일 꿈을 좇고 있다 작살에 찍혀 언뜻언뜻 허연 아랫배를 드러내는 낯선 나와 사투를 벌이는 핓빛 시!

 

 


 

 

이채영 시인 / 보석찾기

 

 

하천의 바닥에 맨발로 서렴

바위 속의 별들과 꽃들이 깨어져 떠내려 와

 

미끌미끌 흥얼거리며 소용돌이치잖니

 

빛으로 서야만 볼 수 있는 광채를 위하여

 

개미총처럼 달라붙은 외로움에 투항해 보렴

 

그곳에 가려고 구입한 지도에서

별이 쏟아지는 지점을 반짝거리는 눈이라고 하자

 

폐선이 박힌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탄식에는

어떤 보석이 숨어 있을까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야

녹아내린 피는 흐르며 굳고 뼈는 흐르며 단단해지지

 

어쩔 줄 모르게 즐거운 발이 묻는 말

몰입할 수 있겠니

물살이 빠른데 네 빛이 강할수록 커지는 굴절의 각도를

꿰뚫어 볼 수 있겠니(…)

 

-'문예연구' 2012 가을호에서-

 

 


 

 

이채영 시인 / 볕바른 마당

 

 

오동나무 한 그루 잘려져

볕바른 마당에서

비 흠뻑 맞고 바람을 쪼이며

검은 울음을 토해냅니다

묵언 정진 삼 년이 지나도

통하지 못한 마음 울렁거리는 밤

끓는 이마에 지그시 손을 얹은 달이 고르는 소리 어느덧 비워 깊어집니다

미처 못 다한 꿈 열두 줄 드리우고

마디마디 꺾고 단내 나도록 떨어

소리 맑고도 넉넉한데

절창에 자라는

오동나무 한 그루 되어 줄 이

한 눈에 알아볼는지요

텅 빈 가슴 뜨겁게 일렁여

하늘을 들어 올리는 드높은 침묵

누가

그 넘쳐나는 푸름으로 번져갈는지요

서두르지 않고 부드러이

기꺼이 볕바른 사람, 사람에게로

 

 


 

이채영 시인

1958년 경기도 안양 출생. (본명 이정란).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엽총을 어디에 두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