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주 시인 / 하루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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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주 시인 / 하루
열흘에 구할을 풍족히 벌어도 하루 일당을 잃어 널 위한 꽃 한송이 주지 못한 게 마음에 맺힌다
하루몫의 사랑을 네게 주지 못해 나머지 아흔 아홉 날 가슴이 저민다
초봄 한 달을 어여쁘게 바라보다 하루 다급함에밟고 지나간 꽃밭은 그 자리만 봄 모르는 민둥산이 되었다
하루치의 무심함은 꽃을 키워내지 않았고 너를 떠나보냈다
단 하루 너에게 소홀했던 그 하루로 널 잃었으니 남은 날이 봄인들 흔한 꽃향기 맡을 수 있을까
-출처: 「익숙함을 지워가는 시간」
차현주 시인 / 호의적인 존재가 셋 등장해요
식충식물에 관한 영상을 보고 있다 동전만 한 손이 파리를 부르고 매끈한 입술로 녹여버리는 영상
믿었던 이미지가 파리채에 튀겨진다 배신감에 치를 떨면 몸에서 잎이 돋아난다
나를 원한 것은 주로 그녀 쪽이었다 진공 팩을 들고 가서 그녀의 겨울 옷가지와 이불을 모두 넣어주었다
이 비닐은 타사 대비 30% 더 쫀쫀한 밀폐가 가능합니다 초고속 압축 시간 8초 남짓 그런 광고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녀의 길어진 그림자도 모두 주워 담았다
나는 시시때때로 불려가 거실에 배를 깔고 우린 파리지옥에 대한 영상을 함께 시청했다
징그러워 영상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기적으로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3초 5초 길어봤자 8초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진공 팩에 그녀를 넣어주고 이불을 덮고 식충식물에 대한 영상을 봤다 몸을 부르르 떨고 마지못해 껴안았다
씹다 버린 육포처럼 자글자글해진 진공 팩이 쌓여갔다 깨끗하고 투명한 내 안에 그녀가 쉴 새 없이 담겼다
영상 속에서는 순진한 식물의 배가 잔뜩 불러왔다
차현주 시인 / xo
내 앞에 있는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은 뒤에서 대답합니다
우린 마주 보고 있지만 등지고 있고 등지고 있지만 서로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당신 집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우리의 시차는 1시간 더 벌어졌고요
잠시 당신 어깨를 빌리면 당신은 정류장에서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빤 적 없는데도 줄어드는 스웨터 당신은 옷을 입지 않기로 했고 옷 속으로 당신 속살을 만지는 것을 이제 못 하게 됐고
도어락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 우리 집이 아니군요 우린 만난 적 없거나 당신은 살아있지 않은 것이기도 하군요
한 봉지에서 두 개의 사탕이 발견됩니다 깨보니 손이 없고 빈 봉지만 부스럭댑니다
차현주 시인 / 달걀말이
나는 달걀을 잘 말아 웃기지 않은 일에 자지러지는 것 다음으로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 아랫목 장판 같은 노란 달걀물을 팬에 풀어 살살 굴리면 신설동 봉제공장 원단처럼 또르르 말리는 게 기분이 좋아 옆구리가 무너져 당근이 기웃거리면 남은 달걀물로 황급히 때우고 감쪽같은 봉합 상처를 부여잡은 패잔병처럼 말아 배꼽은 나의 고향 배꼽에 뜨거운 기름이 튀기도 하지만 출신이 어딘지는 배꼽의 때만큼도 중요하지 않지 나는 손에서 그늘이 자라 엄지손가락에 거스러미가 생기면 얼굴이 까매져 손을 뜯고 있으면 누가 낮에서 밤으로 건너와 내 손등을 탁 치고 달걀말이의 옆모습을 살피듯 내 불안을 같이 견뎌주는 손을 기억하는데 엄마, 배꼽을 틀어막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물어본 적 없어 엄마는 뭐가 무서웠어? 나는 오늘도 계란을 말아 잘 말아 소리 내어 웃지 않고도 가장 잘하는 일 엄지손톱의 거스러미가 또 고개를 꺾네 계란을 접는 일 가끔 패배를 예감하는 일 말리고 말려서 점이 될 때까지 하지만 엄마, 계란을 살리고 내가 죽는 일은 그만할래
차현주 시인 / 사람 손은 함부로 타는 게 아니에요
우물이 울고 있다 길고양이처럼 길게 집 안에는 없는 숲 속에서
숲과 나 사이 어지러운 손금이 있다 어제와 같은 굵기만큼 거만하게 내가 고양이처럼 오래 울고 다시 봐도 같은 입김만큼 숲이 멀리 있다
우물이 내 방에 없어서 나는 숲을 집으로 옮겼다
아침을 먹고 우물의 옆구리에 팔짱을 꼈다 점심을 먹고 틈에 쪽지를 끼워 넣었다
우물을 내려다보며 우물을 생각하는 동안 우물은 나의 뻥 뚫린 콧구멍을 원망했다
운동화 한 짝이 우물 벽을 타고 올라왔다 사람이 버린 운동화로 알고 있는 사람을 떠난 운동화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들쥐의 꼬리가 방의 문고리를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벽이 갈라지도록 우물이 몸을 비튼 밤
투신한 운동화를 들고 한참을 울먹였다
나는 염려하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하늘을 가리는 사람이고 말았다
울음이 많은 우물이 내 방에 없다 우물도 잃은 숲이 내 방에 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과 캣대디들의 제1원칙. 사람이 함부로 만지면 어미가 있어도 데려 가지 않거나 동료 야생 동물들에게 버림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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