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서희 시인 / 고수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8. 16:08

정서희 시인 / 고수

 

 

입에서 칼 한 자루 스윽 뽑혀 나왔다

날 끝을 허공에 빙빙 돌리다 나를 겨누더니

희번득한 빛이 우리의 간격을 두 동강 내며

순식간에 목을 향해 들어온다

방금 누군가를 해결하고 온 사람처럼

거친 숨소리가 삐딱한 자세로 칼등에 걸터앉는다

보기 드문 고수였다

입 안에 숫돌을 물고

날마다 자음과 모음을 갈고 있는지

일합만에 토막 나 버린 내 말은 바닥에 나뒹군다

끝내 등을 주지 않는 내게

칼은, 일방적이었지만

전의를 잃은 상대의 숨은 남겨 두는 자비를 지녔다

당신의 칼이 스르륵 칼집에 꽂히는 동안

나는 부러진 말의 조각들을 줍는다

당신에게 닿지 못한 토막 난 마디들을 이어 붙여

문장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나는 조목조목 아프다

 

 


 

 

정서희 시인 / 흠이라는 집

 

 

상처라는 말보다는

흠집이란 말이 더 아늑하다

 

마음에,누가 허락도 없이

집 한 채 지어 놓고 간 날은

종일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홀로 아득해진다

 

몇 날 며칠

부수고 허물어낸 빈터에

몇 번이고 나는,

나를 고쳐 짓는다

 

 


 

 

정서희 시인 / 문 앞에서

 

 

잠긴 문 앞에 서 있습니다

눈을 들어 올려다보니

창문 틈새로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가 보여요

 

일찍이 오래된 것들은 부패한다고 들었습니다*

녹슨 쇠문이 뱀처럼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조롱할 뿐

열쇠를 찔러넣어도 반응이 없습니다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는 피의자처럼

 

날카로운 쇳소리가 유리창을 잡아 흔드는 것을 보니

그는 폭력적인 성향을 닮았나 봐요

독 안에 든 생쥐처럼 숨을 참고 있는 사람들

 

계단 앞 검불 틈새에 피어난 민들레는

별일 아니라는 듯 흔들리고

나는 문이 열릴 때까지 노래는 허밍으로 부릅니다

어떤 노래는 음정이 높아서 가다듬고 불러도

한 박자씩 늦어지기 일쑤입니다

 

누군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오른손 중지에 힘을 주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주억거려봅니다

나는 이제 수중식물처럼 입을 벌려 말할 수 없고

작은 연못이나 뒤덮는 수초가 될지도 모릅니다

 

거미가 열린 창문 틈을 향하여

그물코를 뜨면서 올라가네요

나도 거미라면 저 높고 튼튼한 담장을 타고

온기가 서려 있는

따듯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요

 

나는 지금 잠긴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에서 빌렸음

 

 


 

정서희 시인

1966년 충남 서산 출생, 본명 정선희 목원대학교 신학과, 경남대학교 국문학과 석사 졸업. 창원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문학박사). 2017년《수필문학》수필 등단. 2020년《문학과 사람》시 등단. 현《문학과 사람》편집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