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시인 / 바람집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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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 시인 / 바람집
만추에 피는 꽃 속에는 바람집이 있습니다 만추의 어느 날 꽃에 귀를 대보면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은 바람계집이 톡 분첩 닫는 소리 들릴 겁니다 후우 불면 날아갈 국화꽃에도 매화 향긋한 꽃술에도 태양 붉은 혀 간지러운 노란 은행잎에도 바람집은 깃들어, 만추의 어느 날 나는 피는 꽃 속의 그 집으로 우리 아버지가, 남편이, 세상에! 내 아들까지 들락날락하는 걸 봅니다 정말 화가 나죠 그러나 까르르 입 속에 꽈리 넣어 불 듯 입술을 오므려 후우 불면 날아 갈 국화꽃에도 매화 향긋한 꽃술에도 태양 붉은 혀 간지러운 노란 은행잎에도 바람집은 깃들어 여기저기서 톡톡 바람계집 분첩 여닫는 소리에, 만추의 어느 날 꽃 옆에서 나는 분첩을 톡 소리 나게 닫아봅니다
김숙자 시인 / 무궁화 벙어리 냉가슴을 보랏빛에 의지하고 찾는 이 없는 골에 모퉁이서 고즈넉히 풍상이 섞어친 몸을 민족혼에 다독였네 터 잃어 아픈 맘을 분홍빛에 달래우고 울타리 부추기며 초가 삼간 지킨 보람 팔월을 피어도 절반 거듭나는 무궁화
김숙자 시인(명헌) / 교귀정交龜亭*
한 가닥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가면 명경 같은 팔왕폭포 가슴에 껴안고서 눈물로 반가운 소식 전해주는 교귀정
누대에 아름답게 물봉선화 꽃이 피고 마주한 노송들이 다람쥐 불러모아 지나는 길손들 발길 머물다가 가라네
*交龜亭 :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소재. 조선시대 신구 경상도 관찰사가 문경새재 교귀정에서 만나 관인을 주고받음으로써 업무의 인수 인계가 이루어지던 곳
김숙자 시인(명헌) / 백조가 된 소녀
사방이 까맣게 물던 공간에 파란 호수가 커텐 뒤에서 나온다. 깃털마다 비취로 장식한 백조 한 마리
수정처럼 마알간 호수에서 기를 모아 발꿈치를 들고 하늘을 향해 일자로 뻗는다.
동그란 원을 그리며 일렁이는 깃털 상 하행으로 크고 작은 달 바다를 이고 자전과 공전을 한다 창공을 오른다.
다시 내려와 살포시 앉는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다.
시기와 질투, 오만으로 자아 상처를 움켜쥐면서 실핏줄을 연신 토해 낸다.
김숙자 시인(명헌) / 사랑무
까만 밤하늘에 내려온 은하수 황금 무대만들어 놓고 대 여섯보 뒷걸음쳐 겹겹이 쌓아 올린
초승달 자리에 둘러앉아 주홍빛 잔잔히 벅찬 공간 만든다.
선남 선녀, 입에 머금은수줍음 다정 다감하게 손 잡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춤사위 한다.
나비가 유혹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가슴 깊이차곡 차곡 쌓인 그리움 보문호수에 오층탑으로 솟아 오른다.
내 마음그대 찾아가슴팍에 파묻혀 부푼 가슴으로 신음하며뒤틀리는 육신 황혼빛에 젖어 무아지경으로 번져오는 회심이 허공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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