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 시인 / 연탄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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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 시인 / 연탄
허기진 내 가난의 상처가 연탄처럼 까맣다 온기 없는 유년의 아랫목 차갑게 식은 열아홉 구멍마다 그리움으로 앉아있는 구남매 간혹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면 검은 상처마다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피어오르던 불꽃들 새벽녘에서야 이불 속으로 꼬리 감추면 메울 수 없는 가난 짊어지고 살아갈 힘은 성난 불꽃임을 안다 행여 꺼트리지나 않을까 잿덩이가 될 때까지 제 한몸 기꺼이 불사르던 연탄 어느 비좁은 비탈길 담벼락에 기대어 언 발 감추고 앉아 목을 빼고 있을까 앙상한 뼈마디마다 구멍 뚫려 식어버린 가슴 뜨겁게 데워줄 이 있을까 제 스스로는 불 밝힐 수 없어 겨울 끝자락에서 뚝 떨어져 내리는 고드름 같은 몸, 흔들리는 불꽃 골목에 오래 서 있다
김선 시인 / 액자 속 내 분신을 보며 이태원역 늦가을 오후에 참사 분향소를 찾는다
출구 없는 비탈진 좁은 골목에서 살려 달라 몸부림친 눈빛들이 보인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흐린 불빛 같은 손길 찾아 간절히 울어대던 주인 잃은 휴대전화 울음이 귓바퀴에 감긴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영정사진 속 핼쑥한 얼굴들 보면서 문득 고향 가는 길에 만난 모로 누워있던 고라니 한 마리 떠오른다
저쪽을 채 건너지도 못하고 예고 없이 닥쳐온 죽음 앞에서 미처 감지 못한 맑은 눈동자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던 짐승의 눈 들어야 할 무언가를 놓친 듯 핏발 세운 두 귀 어느 숲속 비탈길을 내달렸을 다리며 등줄기에 흐르다 마른 선명한 핏자국 처절하게 울부짖던 외마디 비명이 겹친다
이 짧은 길만 올라가면 탐스러운 야생 딸기 따 먹는 줄 알고 아늑한 숲 집으로 향하던 고라니 꼼짝없이 당해야 할 속도 앞에서 아찔하게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짐승들 도저히 맞부딪혀 살아갈 힘이 없는 작은 풀벌레들은 정녕, 스스로 속도의 먹잇감이 되어야 하는 걸까 어찌 고라니뿐이겠는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시 쓰기를 덮어두고 찾아간 이태원로 173-7 골목, 아직도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스멀스멀 뱀처럼 스며든 죽음들이 긴 혓바닥 날름거린다
담벼락에 가지런히 놓인 분향소 액자 속 맑은 얼굴의 여자가 꼭 나인 것 같아 땅거미가 엄습해 와도 자리를 뜨지 못한다
김선 시인 / 폭낭의 아이들
푸름이 깊어지면 눈물이 되나 보다 다시 온 4월에도 푸른 기색 없는 하늘 명도암 4.3공원에 봄비가 오고 있다
희생된 어린 영혼 사월이면 피가 돌아 각명비에 새겨진 세월의 눈물 자국 나직이 이름 부르면 접힌 날개 퍼덕일 듯
북촌리 넓은 돌밭 바람 많은 어두운 숲 피맺힌 폭낭의 굽은 역사 끌어안고 서러운 동백보자기 너븐숭이로 흐른다
-《다층》 2023. 가을호
김선 시인 / 새의 물결무늬
십일월 새들이 저녁 한 끼를 위해 가는 길이 멀다 검붉은 저녁놀은 길 잃은 새의 무리가 지친 몸을 두었다 간 흔적이다 새들이 잃어버린 좌표를 간직한 별들이 아직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시간 긴 길들이 한 순간의 찰나로 남은 마곡사 지장전 뜰 앞 목어의 등에 입혀진 빗살무늬가 새들이 잃어버린 길을 가리키고 있다 젖은 날개 꺾어 처마 밑에 부리고 가던 새들이 풍경 속에 겹겹이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그만 무릎을 접고 싶을 때마다 잠들지 말라는 이정표다 가시들 도사린 까만 밤의 깊은 곳까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하늘에도 남겨 놓고 바위에도 보이지 않게 새겨져 있다 그 저녁, 지친 몸을 끌고 찾은 선술집에서 하루 노동을 씻어내는 소주병에도 옮겨진 물결무늬가 출렁이는 걸 본다 시간을 끌고 가는 길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팔뼈 어긋나도록 금 그어가는 노동의 수고로움만큼 열린다 서두르지 말고 달디단 파장을 나누며 가라고 새들의 물결무늬가 내려앉은 것이다 길을 다시 찾은 새들이 길 없는 길에 무늬를 새로 새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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