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응 시인 / 라푼첼의 노래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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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응 시인 / 라푼첼의 노래 나의 다락방 구석에서 재봉틀을 돌리면 황금물고기가 웨딩드레스에 알을 슬었다
앞날을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은 마천루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위태로웠다
퍼즐을 맞추는 건 나의 일과 구름뿐인 조각을 흩트리는 건 바람의 일과
오늘도 과부거미의 실은 모자라고 올 풀린 노을이 망루를 덮으면 태양이 시계탑의 문자반처럼 둥글게 닫혔다
드르륵드르륵, 코를 골고 있나요 드르륵드르륵, 눈알을 굴리고 있나요
창틀 위로 출렁이는 어항 속 풍경 가면무도회가 절정인 그림책 글자들이 떨어지고 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스팽글 물고기가 빨려 들어간 빨간 눈동자 눈부신 네온사인처럼 위태로웠다
바늘은 피뢰침 번개는 부러지고 시계는 열두 시에 울고
드르륵드르륵, 태엽을 감나요 드르륵드르륵, 밧줄을 내리고 있나요
갈수록 높아지는 하이힐 갈수록 굽어지는 지팡이
오늘도 종이인형의 그림자를 오리며 이야기가 빠져 죽은 거울에서 납작해진 뒤통수를 살려내고 싶었을 뿐
말풍선을 박음질한 지퍼가 밤이면 또다시 무거워진다
아침에 싹둑 잘린 머리칼이 밤이면 또다시 길어진다
김이응 시인 / 한밤의 히치하이킹 스타킹에 발을 밀어 넣을 때마다 밤 기차를 타는 기분이랄까
사라진 발가락, 사라진 종아리, 사라지는 허벅지,
작은 거스러미에도 멀리 가버리는 길 번번이 놓쳐버리지만, 괜찮아 이정표에는 새로운 목적지가 표시되니까
실크 양말 구둣발과 망사 하이힐이 얽히는 스텝으로 이별이 속도를 높이는 소실점까지
허리춤을 잡아당기면 복선으로 말려 올라오는 뜨거운 눈빛
구멍 난 바람의 맨살은 더듬지 말고 휘파람 불어 주름치마 부풀려 엄지 척, 치켜세우면 발꿈치부터 들리면서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왕이 된 기분이 될까
스타킹을 창턱에 걸어놓은 밤, 도움닫기 없이 뛰어내린 플랫폼에서
머리까지 풀어 헤치고 마지막 기차는 트랄랄라로 떠났으니까 귀신처럼 맨발로 떠도는 거야
김이응 시인 / 나와 오디와 너와 뱀과
오디가 떨어진 오월을 지나간다. 나는 오디를 피해 가고 너는 오디를 밟고 간다. 발밑에서 뭉개지는 오디가 꿈틀거려 내 두려움이 네게도 물들 거야, 지레짐작하며 오디에 집중하는 내 그림자를, 네 말이 꾹꾹 밟고 간다. 어디서든 돌아보면 우리들은 떠나가고 가기 오디가 있던 흔적도 보이지 않을 텐데, 사족이 길어지는 계절이 다가온다. 길을 질질 끌고 오는 뱀을 피해 길바닥에 눈을 떨어뜨리면 오디에도 눈이 달렸는지 눈동자가 굴러가는 두 갈래로 기억이 달라진다. 어디서부터 달라진 건지, 나는 네 그림자를 몰라보고 너는 뱀을 보지 못했다고 말을 돌리는데, 눈이 밝아진 거야, 내게도 자주 들키는 뱀의 혓바닥도 길어졌다니까, 그렇게 내 피해의식부터 씻어 없애라는 너의 말은 뱀딸기의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아, 우물에는 온통 오디 물이 들어 있고 나는 여름날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어 뱀이 먹는다는 뱀딸기와 네가 꿀꺽 삼킨 오디들을 떠올렸다 생각이 어두워져 혀끝부터 장마지고 비의 허물이 물컹해졌다. 뱀딸기가 보이면 뱀이 나타나고 뱀이 보이지 않으면 너도 보이지 않아. 오디주는 시어지고 나의 눈은 자주 찡그려졌다 -월간 『모던포엠』 (202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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