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조희진 시인 / 고래고래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0. 19:16

조희진 시인 / 고래고래

 ‘잘못’이 전달된 이후엔 침묵이 필요하다 무심코 레몬 껍질을 벗긴다 쪼개면 둘이 되는 그러니까 모른다

 

 셋인지 넷인지. 잘못을 쪼개면 쪼갤수록 하나씩

 

 셔츠에 붙어 있던 단추가 일렬을 잃고 떨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는 단추들. 나와 같은 단추를 모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부딪히는 단추가 흔들리며 떨어진다 모른다 셔츠의 주머니 속

 

 레몬 깊숙이 보관된 침묵을 벗기면 공평하게 나눠야 할 조각은 부족하고 단추가 움켜쥔 근육을 흔들며 떨어지는 내가

 

 주워야 할 단추는 왜 자꾸 늘어나는 걸까 뒤집힌 껍질을 씹는다 씹고 씹어도 씹히질 않는다 삼켜도 삼킬 수 없는 맛.

 

 잘못이 넷인지 침묵이 셋인지. 세는 순간

 

 레몬에 맛 같은 건 없을 수도 있겠다 뒤집을 수 없는 호주머니 속엔 자꾸 나머지 침이 고인다 레몬 하나를 또 집어 든다

 

 껍질은 침묵. 조각은 잘못. 오늘과 같은 방향 이후가 내일이라면

 

 아무렇게 던져버릴 수 없는 레몬이 나를 벗어나 제멋대로 굴러가는 그러니까

 

 내일을 부탁하러 오늘은 어제로 갔고 어제는 레몬이 물러터져 발효하기를 기다림. 이후

 

 내 맛도 네 맛도 아닌.

 

 


 

 

조희진 시인 / 고래는 파도가 좋았다

 

숨막히도록

밀려오는

거품들의 향연,

고래는

콧속을 간질이는

그들의 외침이 좋았다

쉴 새 없이

달려가는

걸음발의 진동,

고래는

순간을 아우르는

그들의 울림이 좋았다

고래는

그의 몸에

자꾸만 부딪혀 오던

그들이 좋았다

 

 


 

 

조희진 시인 / 물방울 캔디

 

 

 날카로운 양날의 칼을 둥글게 감춘, 우리들 사이엔 견고한 뼈대가 없었어요

 흔들렸어요 휘파람을 굴리며 간단한 눈인사로 연대감을 나눴죠 그들의 취향과 만들어 먹는 레시피가 궁금했지요 경계 없는 구역들을 떠돌아 다녔어요 바람의 토핑대로 쏠려 다녔죠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육질을 선호했어요 붉은 속살을 터뜨려 서로를 먹였지요 가끔은 그늘 속 깊숙이 묻어 둔 썩지 않은 소문 따위 불쑥 끄집어 내, 천천히 녹여가며 아껴 먹었어요 화창한 대낮보다 비 비린내의 밤을, 포근한 침대보단 베란다 난관을,

 언제부턴가 사라진 캔디의 비밀에 대하여 침묵이 활처럼 휘어졌을 때, 화려한 꽃다발 리본처럼 묶였던 우리들이 조금씩 분절되고 있었어요 환기구로 빠져 나갔던 시간들이 찌든 먼지들로 역류하고 있었죠 어투와 관성이 서로 다른 무늬의 얼굴들, 과 부화에 걸린 기억의 타이머가 폭발할 것 같았어요 희망이 조급해진 맥문동 열매들이 설익은 채 까매지고 있었거든요 아마 뜨거웠던 우리들의 여름밤을 깡그리 잊고 말거에요

 지금도 우리는 매일 같은 길을 걷고 있어요

 같은 나뭇가지에 위험하게 매달려 식탁을 나눠 쓰죠 같은 침대 같은 꿈

 신호 없는 교차로에서 서로 엇갈려도, 서로를 터뜨린 극지에서 다시 만나 단단히, 엉겨 붙게 될 거에요

 

 


 

조희진 시인

경남 함안 출생, (본명: 조희자). 경기 오산 거주, 한국방송통신대 일본어과 졸업. 2013년 《시산맥》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