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서령 시인 / 군밤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0. 19:32

임서령 시인 / 군밤

 

 

아야 느그 아부지 으째 여직 안오신다냐

엄마의 성화에 아버지 찾으러 갔던

해거름녘 장터 모퉁이 실비집,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는 아버지 뒷모습을 딱 보고 말았다

못 본척 부리나케 돌아오는 길

싸구려 분냄새가 어질어질 따라왔다

아무리 찾아도 아버지가 없더라고 볼멘 소리를 내지르곤

밤새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영산포에서 화정리까지 시오리 길을

술 취한 아버지를 끌고 온 건 자전거였다

걷다가, 타다가, 개골창에 거꾸로 꼬나박다가,

비틀비틀 흙투성이로 들어선 아버지한테

울 엄마 가재미눈 치뜨며 아예 그년한테 가서 살으라고

서슬 퍼렇게 대드셨다

 

흙 묻은 잠바를 버끼는디 누런 봉다리에

다 식은 군밤 몇알 들었드랑께

내 군밤 좋아하는지 알고

술짐에도 고것만은 멕이고 싶었든갑제,

의식 잃은 아버지 곁에서 엄마는

뜬금없는 군밤 이야기만 하고 계셨다

느그 아부지 살려야 돼야,  먼 일이 있어도 살려내야 헌당께

엄마는 새까맣게 타들어간 속,

속도 없이 군밤 몇알과 바꿔 버렸다

 

군밤 한 봉지가  

앙다문 밤송이같이 단단히 닫아 건

엄마의 밤을 잠재웠다

 

 


 

 

임서령 시인 / 타고 오르는 것의 본능

 

 

개나리 산수유 새살대는 봄이건만

올림픽대로 한남대교,

교각을 친친 감은 메마른 넝쿨식물

새까만 뼈대를 드러낸 채

죽었는지 살았는지 미동도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완강한 구조물에도

틈이 있다. 그 미세한 틈 사이

천신만고 뿌리를 내린 어린 잎 하나,

콘크리트 교각을 제 몸인 양  끌어안더니

소음과 매연으로 몸피를 불려간다  

계절을 무수히 갈아입으며

단단히 깍지 낀 손을 놓지 않는다

 

혹독한 겨울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다시금 시퍼런 독이 오른다

혼신을 다해 거대한 다리를 떠받치고  

싸늘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푸른 피를 수혈한다

 

벌떡, 도시를 일으켜 세운다

 

 


 

 

임서령 시인 / 미니말

 

 

흘러내리는 갈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너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작달막한 다리, 볼록한 배

낯익은 듯 낯선 모습

 

생각해 보면 먼 옛날

소꿉놀이가 네 비운의 시초였다

인형에 양주, 향수, 미니 과일이 디저트로 각광받고

비틀고 잘라낸 뒷산이 통째로 정원에 들어앉았다

갖가지 미니어처가 판을 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축소의 세계에 동물도 등장했다

 

긴 모가지, 날렵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는

이제 네 것이 아니다

넓은 수평 시야 각, 온순한 성품

위험상황을 기억하는 유전인자만 고스란히

눈 먼 이들의 안내마로  팔려나간다

체고* 34인치가 한계

작을수록 대접받는 너의 세계

하나의 새로운 종이 탄생했다

 

미니 말,

거세당한 젖은 눈망울이

도심 한복판에 서 있다

 

* 체고(height)- 지상에서부터 말의 등성마루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를 말한다

 

 


 

 

임서령 시인 / 상상 임신

 

 

어느 날 바람이 다녀갔다

그의 혀가 이마를 쓸고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속수무책, 몸이 달아오르고 유두가 단단해졌다

배가 불러왔다

 

황금빛 루드베키아 사그락거리는 대덕면 국도변 언덕배기,

버섯 지붕의 카페가 고즈넉하다

천의 표정을 가진 토우들이 수비병처럼 늘어서 있고

하릴없는 자전거는 잔디를 베고 누워

자꾸만 높아지려는 하늘을 끌어 덮는다

 

창문테두리까지 초록으로 물든 성하(盛夏),

커다란 청동 문고리가 쩔렁쩔렁 통나무 문짝을 두드리면

메이테 마르틴의 애절한 목소리가 늪처럼 차오르는 곳,

카푸치노 시나몬 향이 낮은 음표처럼 테이블 위로 내려앉는다

벽면 군데군데 적힌 짤막한 은유들이 고독에 중독되고

창가 피아노는 오래된 악보를 껴안고 졸음에 겹다

 

꼭 한 번 다녀간 바람을 기다리는 카페

'중독된 고독'*만이 상주하는 곳

여름 한 철 호된 입덧을 앓으며 여자의 목은 망루처럼 높아졌다

오래 비워둔 가슴으로 사과꽃 향기 스친다 꽃의 지문이 흘러간다

 

*중독된 고독: 스페인의 플라멩코 싱어인 '메이테 마르틴'의 대표곡.

 

-계간 『시와 사상』 2014년 봄호 발표

 

 


 

 

임서령 시인 / 상처의 힘

 

 

이삿짐을 싼다

제발 이제는 좀 단출해 보자고 온 밤내 달그락거리며

미련스럽게 끌어안던 낡은 살림을 정리한다.

입어 보지도 못하고 삼 년을 넘긴 빨간 앙고라 스웨터며

발이 아파 모셔 두었던 하이힐을

두세 번 만져보다 대문 밖에 내놓는다

세트로 구색 맞춰 장만했던 그릇들

깨지고 귀가 나가 공기 네 개,

대접 네 개가 각기 다르다

묵은 그릇도 주섬주섬 검정 비닐에 싸서 내놓는다

 

이른 새벽 도착한 이삿짐 차를 앞세우고

뒤따라 골목길을 빠져나가다

담 밑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물체를 본다

옷이며 구두며, 철사로 된 옷걸이조차 다 주워 갔는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그 신세가 눈물겹다

생채기 무수한 그릇을 다시 보듬어 안는다

이리저리 부딪쳐도, 끓는 물에 삶아대도,

악착같이 깨지지 않고 살아남은 건

상처의 힘,

 

내 온몸도 상처투성이다.

 

-시선 2010년 겨울호

 

 


 

임서령 시인

1961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2010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산맥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