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웅 시인(서울) / 사회인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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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 시인(서울) / 사회인
오늘 밤 나는 사람을 죽일 것이다 라고 쓰고, 십 년이 흘렀다 몇 명의 여자와 연애를 했고 그보다 많은 여자와 잠도 잤다 멀쩡하게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누군가 과장님 하고 부르면 그럴듯하게 웃으며 돌아본다 다정한 삼촌이 되었고 주택부금도 붓는다 더 이상 정부를 원망하거나 강남에 사는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오늘 밤 나는 사람을 죽일 것이다 라고 쓰고, 강산이 변했다 시인이 되었고 시 쓰는 건 포기했다 첫사랑을 생각하며 수음을 하거나 아무리 취해도 벽을 후려갈기지 않는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번듯한 가족이며 직원이다 그러니깐 나는 오늘 밤 사람을 죽일 것이다 라고 쓰고 모든 게 완벽해졌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살의를 온전히 길러 내는 내가 나를 죽이기 전까진 개미 새끼 하나 못 죽일 것이다
―계간 『시작』 (2013년 겨울호)
김정웅 시인(서울) / 멸족(滅)에 관한 서시
1 침을 묻혀 시집의 책장을 넘기는 것은 미리, 죽음에 혀끝을 대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자와 마주치면 서글프다
2 정신적인 암을 선고받은 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다 겨우 손바닥만 한 종이 위에 일생을 요약할 수 있는 시간은 유서를 쓸 때뿐이다, 말끝을 흐린 유언처럼 생은 한낮에도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그때마다 동종(同)의 선지자가 남긴 한 권의 유서를 읽으며 먼저 나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살아서 세상 그 어떤 고문(閉)으로도 열리지 않던 입이 그 순간만큼은 짐승의 사체처럼 아- 하고 벌어지는 것이었다
3 시를 읽는 족속에게 종족보존본능이란 고독이었다 스스로를 거세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한 마리 유령으로 살다가 시인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매일 밤 물에 빠진 자의 허우적거림처럼 절망적이었던 섹스, 그러나 아침이면 기형의 추억을 사산하고 근친상간을 저지른 자가 강으로 가듯, 우리는 슬그머니 죽어 갈 뿐이었다
4 불치병 환자가 면도날을 챙겨 여행을 떠나듯, 가방 한구석에 시집을 숨기고 살았다 이미 유작처럼 쓸쓸해져 버린 여생, 이제는 하관을 하듯, 덜컹- 황혼이 내려앉는 곳에만 있다는 시인들의 무덤에 내가 술을 부어 줄 차례다 일족의 적멸, 그 연혁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바람의 곡(栗)을 구겨 삼킬 것이다.
김정웅 시인(서울) / 짐승스타일 1
강제로 벗겨진 옷가지처럼 구겨진 여자는 돌아누워 있다 척추를 따라 지퍼를 꽉 채운 등, 남자는 목덜미에 손을 넣어 꼬리뼈까지 지익- 발가벗은 그녀를 한 번 더 강제로 벗긴다, 아무리 목을 비틀어 봐도 봉제인형은 죽지 않아, 싸구려 솜뭉치 같은 슬픔이 방의 모든 구멍에서 튀어나온다, 이 시뻘겋고 물컹거리는 내막은 사람은 살아서 건널 수 없다는 사막, 혹은 짐승이 아니면 견딜 수 없다는 적막, 이리 와 내가 너의 고장 난 횡격막을 고쳐 줄게, 어미가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의 입속에 숨을 불어넣듯 여자는 있는 힘 다해 생의 전부를 쥐어짠다 건드리기만 해도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어둠의 점막, 그 서로의 가랑이에 얼굴을 끼우고 두 마리 짐승이 하나의 거대한 똬리를 트는 순간, 몸통을 관통한 출구 없는 터널 속에서, 드디어 우리는 만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주검이 묻힌 지하로 실핏줄을 뻗는 시간(屍姦)의 시간(時間) 창밖에서는 개들이 짖기 시작한다 새벽이 올 때까지 사람들은 남김없이 마음을 물어뜯길 것이다
김정웅 시인(서울) / 저 죽은 새가 그대의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름새의 뼈 위로 눈이 내린다, 아니다, 떠나지 못한 것은 새가 아니다 내내 여름인 고향이 새를 떠나고 구더기 떼처럼 들끓었던 타국의 여름이 새를 떠난 것이다. 살아서 평생 열을 앓았던 몸에서 하나의 계절이 떠나는 것을 본다 새의 텅 빈 두개골 속, 그 어둠을 모두 메워 버릴 듯 눈은 내리고 끝내 내 몸에 정착하지 못한 계절을 따라서 달아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동안 내가 주었던 것은 체온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발목까지 쌓인 눈 속에서 발 없는 귀신이 된 것처럼 춥다, 얼어붙어도 흐르는 저 강처럼 자꾸 도망을 치던 그 여자를 끝내 건너지 못했다 유령이 되어서도 건너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흙탕물 일었던 그 여름의 강이 이 어둠 속에서, 눈발 속에서 다시 슬그머니 수위를 높인다. 이런 날에는 사람이 빠져 죽어도 세상은 눈치 채지 못한다 지난여름 내내 번성했던 추억들이 멸종하고 있다, 멸종된 동물들에 대한 도감(圖鑑)에서 이 장면을 본 것만 같아 슬프다, 내 생의 모든 페이지를 넘겨 버릴 듯 바람이 분다, 더 이상 채집할 추억은 없다는 듯, 그가 새의 두개골을 주머니에 넣고 발을 잃어버린 나를 이곳에 두고 간다 세상이 캄캄해진다, 이제는 그만 인생을 암전(暗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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