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기세은 시인 / 화양연화(花樣年華)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1. 21:54

기세은 시인 / 화양연화(花樣年華)*

 

 

언제부턴가

사내가 쫓아 다녔다

어디서나 보였다

간혹 새벽에

옆에 누워있는 사내를 보고 기겁했다

언제나 표정이 없었다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먼저 말을 건넸다

그 후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목이 쉬어라 불러댔다

대답은 없었다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그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졌다

다른 여자를 쫓아다는 사내를 발견했다

나는 사내를 쫓아다녔다

어떤 표정도 읽어 낼 수 있었다

다정한 말을 건네며

늘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내는 간혹 그런 날 보며

신기해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제목

 

 


 

 

기세은 시인 / 욕辱

 

 

나는 물고기다

그가 나를 잡았다

나를 생선이라고 부른다

그는 매일 나를 채색한다

나는 화사해진다

침침해진다

반복된다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오로지 그의 눈을 통해 나를 만난다

그는 내 주둥이에

그의 페니스를 집어넣다

달콤하다고 느낀다

그는 이리저리 돌린다

깊게 들어오진 못한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집어넣는다

겁에 질린 붕어같은 표정이다

나는 페니스를 씹어서 먹어버렸다

더 이상 나를 색칠해주지 않는다

다른 물고기를 채색하고 있다

물고기는 주둥이가 없다

나는 나를 뚜렷이 응시한다

어떤 색도 필요하지 않다

목구멍에서 쓴 맛을 느낀다

이윽고 토해냈다

그것은 그의 페니스였다

잡색이었다

나는 투명해졌다

 

계간 『시와 반시』 2009년 가을호 발표

 

 


 

기세은 시인

1984년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제7회 《시작》 신인상 공모에 〈내 슬픈 전설의 25페이지〉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