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정숙 시인 / 나비와 피라미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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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정숙 시인 / 나비와 피라미드
나비 한 마리가 출근길에 처무우밭도 아닌 바다도 아닌 지하철 역사로 팔랑거리며 내려앉았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다시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가만히 멈춘 날갯짓 나비에게 역은 저 너머 얼음 박힌 우주처럼, 끝내 풀지 못할 방정식처럼 차갑고도 큰 세계이다 나비는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다 지하철을 타고 꽃밭으로 가려는 것도 아니다 나비는 자신의 피라미드를 찾아온 것이다 봉인되지 않은 나비의 피라미드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더 단단해진 무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발자국 소리, 전동차의 울림과 궤적을 부장품으로 넣었음이다 부장품이 사라진 역사는 나비의 존재를 우상화하고 저물녘 낡아가는 기울기 속에서 꽃의 지문을 더듬던 혼잣말까지 모두 박제로 만들어간다 여기, 저기 흔들리며 걸어가는 나비의 피라미드
-『문파MUNPA』 2020-여름호
사공정숙 시인 / 둥근 것들에게 바치는 경배
담벼락에 기대고 무심히 서 있는 자전거 바퀴를 일없이 돌려보네 삐걱대며 돌아가는 둥근 쳇바퀴 따라 문득 지나온 길들이 손에 잡히네 길섶 아침 이슬과 일몰의 광휘가 사라지던 반복의 패턴 속 누군가 둥글게 먼 시간의 바퀴를 굴려온 밥상 위에 가만히 놋수저 한 벌을 얹어 보네
둥근 것들이 지나온 길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 눈물방울 굴려 진주를 품는 일처럼 난해한 공식이었지만 일어난 일들은 모두 오답 없는 정답이었다 외쳐보네
보름날 내 모난 날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지문이 닳도록 꽃을 시샘하는 마음까지 얹어 경단을 빚듯 둥글리는 날 지구를 굴리며 우주를 산책하던 호기로운 당신과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둥근 것들에게 한 아름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서*바치네
*도연명의 시「채국동리하彩菊東籬下」 중에서
-시집 『신은 멀미를 해도 괜찮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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