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조진리 시인 / 숲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2. 20:51

조진리 시인 / 숲

 

 

숲은 金과 같아

모두 반사할 빛들을 속에 지니고 있다

나뭇가지와 이파리와 엽록소와

끝으로 다다를수록 짙어지는 숲

이파리 사이로 검은 반점을 옆구리에 끼고

해가 떨어진다 바짝 몸을 굽혀 떨어진다

푸른 광속이 숲 사이를 헤매다 사라진다

 

숲은 치마를 들치고 앉은 종아리 같아

한 입 베어 물면 침이 고여

사타구니 아래 저절로 늪이 생기고

젖으면서 흙과 함께 쏟아져내리는 잔뿌리

부르르 떨리는 묽은 수면

한숨 섞인 긴 여운도 새가 지나가다 베어 무는 것

새의 부리가 숲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길게 찢어놓는다

계곡 근처에서 발뒤꿈치를 들킨다

 

숲은 산 앞에 사당 같아

신발을 벗고 머리를 조아린다

유행 지난 신의 이름들 읊조리고

떡갈나무, 오동나무, 잣나무

그 엎드린 궤도 위를 밟고

소문도 필요 없이

동백꽃 떨어져놓고선

깜빡하고 계속 피고 지고

피고 지고 그러다 만다

 

 


 

 

조진리 시인 / 문이 없는 집

 

 

뒤집어놓은 샴푸 통이거나

가위로 반틈 잘려 하얀 속을 보여주는 치약이나

벌어지고 부드러워진 칫솔이거나

코피가 나는 줄 모르고 닦아

분홍색 번짐이 생긴 수건이나

물기가 마르지 않는 아이보리색 대야나

물방울무늬로 말라버린 거울 끝자락이거나

주황빛이 맴도는 깨진 전구거나

때 탄 환풍기 사이로 검은 속이나

이 집에서 살다간 다른 가족이 붙인

발자국 모양 스티커나

고장나버린 손잡이가 시리거나

물이 여러 갈래로 새는 샤워기나

뭉개져 여러 조각으로 깨진 빨랫비누를

커피색 스타킹에 모아둔 거나

젖어 있는 어떤 것이나

밤마다 놀라 질색하게 되는

작은 나방 같은 것이거나

 

그 풍경을 뒤로하면

작고 굽은 등이 보인다

고장난 초인종 때문에

이 풍경을 찾는 사람들은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도무지 날아가지 않고

몇 년째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

 

 


 

조진리 시인

1991년 대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2013년 계간 《시와 세계》 상반기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