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영자 시인 / 파이프라인은 어디 있을까

파스칼바이런 2025. 8. 24. 21:28

김영자 시인 / 파이프라인은 어디 있을까

―간격이 사라지면

 

 

함양 가는 길에서 웃는 산을 만났다

 

멀리 앉아 있는 산 물결을 바라보다가

산이 먼저 웃으니 간격이 사라지고

간격이 사라져 손을 내밀었더니

천의 지느러미들이 달을 낳을 무렵

황어 떼가 돌아오는 화개천花開川에 내려오라는데

 

기척도 없이 찾아온 물고기 한 마리가

벌써 나를 읽는다 한참 동안

손바닥을 읽고 난 후 어깨 위로 올라와

등을 읽고 있다

마른 등을 훑고 난 후 사라지는

붉은 띠의 물고기들이 다시 몰려와

내 부끄러움 걷어 낼 때

늑골 속에서 열리는 파이프라인의 경전

 

수많은 알집에서 쏟아지는

달덩이 달덩어리의 알몸은

함박눈처럼 끌어안고 싶은

따뜻한 생의 봉분

그 봉분 속에서 넝쿨 올리면

 

차디찬 벽을 들어내고 왕래할 수 있다는데

꽃숭어리 숭어리 사이사이에

바람길 생기고

창문을 열면 모든 간격이 사라진다는데

나는 왜

산보다 먼저 웃지 못할까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김영자 시인

1997년 《문학과 의식》 을 통해 등단. 시집 『양파의 날개』 『낙타뼈에 뜬 달』 『전어비늘 속의 잠』 『호랑가시나무는 모항에서 새끼를 친다』 등.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 가톨릭문인협회 이사. 미당문학회 이사, (사) 시와산문학회장 역임. 공간시낭독회장 역임. 현재 「광화문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