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남 시인 / 종이인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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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남 시인 / 종이인간
축축이 젖은 종이로 태어난 순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풀거리는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세상에 태어나 배운 것은 필요 없는 부분은 오려내고 세상에 어울리기 위해 흰 부분을 색칠하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오려낸 부분은 휑하니 텅 빈 듯 보였고 너무 많이 색칠한 부분은 더 이상 칠할 수 없었다.
무거운 동전들보다 가벼운 지폐들이 어울렸다. 기억할 일들이 있으면 종종 아무 곳이나 기록해 놓았다. 거의 누군가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그리고 계좌번호였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허우적거렸다. 툭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그곳은 멍자국이 생겼다. 멍자국은 점점 늘어났다.
시간이 지나고 과거가 쌓이고 현재도 지나가고
어느 순간이 되어보니 곳곳이 구멍이 나고 조각조각 가위질 되었고 온통 검게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나풀거리지도 못하고 더 이상 가위질도 색칠도 가능치 못하게 되자 빨간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 줌의 재가 전부였다. 그것도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윤덕남 시인 / 그림자
그것이 언제부터 나에게 달라붙어 있었는지 모른다.
기억의 모닥불 주위를 맴돌며 그것이 춤을 추고 있을 때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내가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내가 생각의 뿔을 내밀 때마다 그것은 나와 달라붙어 있었고 내 생각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그것은 대심문관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일어서고 누울 때마다 나의 시간을 모호한 웅덩이로 몰아넣었다.
내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내 삶이 야생 고사리처럼 돋아나는 순간까지 그것이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이 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은빛 라이터 불꽃에 아버지의 유품인 라이터 불꽃에 그것을 태워 보려는 망상이 일어났다.
눈부신 불꽃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다 아버지가 들어간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 몸에서 돋아난 거무스름한 곰팡이라고 아니면 엎질러진 검은 생각이라고 그렇게 치부하고 싶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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