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규화 시인 / 줄어든다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6. 13:56

김규화 시인 / 줄어든다

 

내 키가 줄어든다

내 빵은 조금이면 된다

척추를 갉아먹는 時針이

내 양을 줄였다

천연색으로 나를 유혹하던

TV세상이

단색으로 가지런해졌다

내 오락도 조금이면 된다

칼로 뚝 자른 푸줏간의 욕망

적당량으로 저울에 재어

내 무릎에 놓인다

無明의 눈을 뜨는 곳에

내려와 쌓이는 寂寞

내 공간은 조금이면 된다

 

 


 

 

김규화 시인 / 바다를 밀어 올린다

 

바람에 삭인 하얀 얼굴을 들어올리며

원망이 살갗에 반점을 만든다

꽃을 사랑하지 않고

슬픔을 달덩이같이 품고

웃음을 멀리 하고

고마움은 개울을 건너다 빠뜨려버리며

가슴에 품고 있던 말들을 토해 내면

원망이 다시 일어선다

겨울비를 맞으며

가로수 밑을 걸어가는 원망이

나목들 앞에서 춥고

온기는 멀리 낭떨어지까지 밀리어간다

냉수로 세수한 맑은 얼굴의 수녀가

해변을 동글게 감싸며

바다를 밀어 올린다

물거품을 떠뜨리고는 말이 없는 원망

주로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눈에 안 보이는

의식 혹은 파편들을 제재로 쓴 김규화 시인의 열세번째 시집

시는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거나 논리를 초월한다

어둡고 무겁다!

 


 

김규화 시인 / 관념여행

 

 

말을 아니하여

가슴 속에 묻힌 말

나타나지 않은 없음

답답한 말,

절대절명이 한 밤의 어둠 속에

등두렷이 떠 있다.

 

말을 아니하여

꼭두각시 인형.

가슴 속에 말을 묻고

두드러기 솟아

몸 밖으로 터지려는 말

끌려간 노예의 심장을 겨냥한다.

 

바위덩어리의 힘에

풍화작용의 시간을 재며

다 바스라져 허공을 날리는

힘이 되어버린 그 다음

꺼내려는

가슴 속에 묻힌 말

 

힘을 사용함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인가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인가

모래밭에 박힌

말 아니한 혀

꼭두각시 인형의

 

-<힘·3>

 

 


 

 

김규화 시인 / 키가 같다

 

 

김제 만경 푸른 벼논이

한여름 땡볕에 펄펄 끓어

푸른 벼논이 하늘에 가 닿아

하늘과 땅이 한일(一)字로 입맞추어 있다

한일 자의 길이가 너무나 길어

내 눈이 오른 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돌아가기 까지의

아슴한 선

똑같은 크기로 한없이 늘어져

햇볕 쨍 하는 한낮

구름덩이 이따금 먹물을 놓다가

둥글둥굴 사라지는 외에밋들 너른 들

흩어서 가까이 가보니 키가 다르다

모이서 멀리 바라보니 키가 똑같다

김제 만경 푸른 목숨들이

 

 


 

 

김규화 시인 / 목숨과 텃밭

 

 

땅은 어머니에게 목숨을 주네

땅은 어머니에게

땅이 낳은 곡식이며 채소를 주네

 

어머니는 팔십팔년을 땅의 목숨을 쓰다

땅은 이제 돌려달라 제촉하다

 

열 달을 살았던 내 텃밭에 일이 나다

바람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려하다

 

나는 누워있는 텃밭을

두 발로 꼭꼭 밟고 오똑오똑 서서

나는 지금 살아서 살다

 

텃밭이 있어 태어난 내 고향밭이

천둥번개 속으로 서서히 묻히려하다

 

잠시 준 목숨을 가져가겠다,

물로 불로 흙으로 돌려받아

 

또 다른 목숨으로 태어내겠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제촉하다

 

 


 

 

김규화 시인 / 떠돌이배

 

 

나는 작으마한 떠돌이배

30억 나이의 내 유전자 싣고

먼 은하계 샛길을 흘러내려

망망대해에 이르는

 

때론 원시의 푸른 연못에서

실컷 곤죽을 먹으며 살았던

10억 나이의 내 단세포가

몹시 궁금한

 

그동안 돌연변이를 거듭했지

하마터면 은하바다에 풍덩

빠져죽을 번도 했지

새와 나무의 겉옷을 영원히 벗기까지는

 

거미줄로 얽혀 굳은 내 근육의

껍질을 깨뜨리면 눈물 뿐

80해에서 매듭이 생기고

 

유전자는 어느 항구에 닿으리

 

하역荷役을 서두르는 나는 지금

밑도 끝도 없는 은하바다에서

불타는 태양의 궤도를 도는 떠돌이배

30억 나이의 살아 푸르른

 

 


 

 

김규화 시인 / 제주마

 

 

말하는 대로 그는 눈발을 해적해적 걸어가더니 사라져 버렸다

말하는 대로 그녀는 눈을 감더니 숨이 끊어졌다

말하는 대로 소년은 공을 던져 바스켓에 넣었다

 

한라산 자락 용강동 견월악에

축산공원 목마장이 있어

천연기념물 제주마가 170마리

순수혈통 성골로 산다

 

눈 오는 날에는 눈발 같은

비 오는 날에는 빗발 같은

그들이 찾아와 말 등에 올라타고

말 하는 대로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진다

 

말과 한몸이 되려면 말과 친해야 한다

말 등에 올라앉아서 뛰는 말에게 배워야 한다

 

편자를 끼고 네 다리를 크게 벌려

서울에까지 닿는 제주 말이다

 

 


 

 

김규화 시인 / 콜로라도 레인저

 

 

"느긋하고 사교적"인 콜로라도레인저는

주인의 저녁 파티장에서도 미움받지 않는다

흰 바탕에 검은 점박이 옷을 입고

새하얀 꼬리를 머리채로 흔들며

콜로라도 넓은 목장의 목책을 뛰어 넘어

저녁이면 소 떼를 몰아 우리에 가둔다

 

육십갑자 아랫줄 12지에서 일곱 번째

오를 모여주려면 말을 끌고와야 한다

오 띠를 말이 대신한다

갈기를 휘날리며 휘휘 달리는 말

 

말놀이가 끝나면 아이들은 물놀이를 한다

개구리 모양 사지를 벌리고 강물에 뛰어들다가

양 선수 모양 각목 같은 몸을 두어 번 굴리다가

높은 언덕에서 강물에 뛰어든다

 

마당이 물놀이로 가득 찬다

보르네오 칼라만탄 수상마을에서

천사 아이들이 물마당으로 뛰어든다

 

 


 

김규화 시인 (1940-2023 향년 83세).

1940년 전남 승주 출생. 동국대학교대학원.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상한 기도』 『관념여행』 『평균 서정』 외 다수, 시선집 『초록 징검다리』 『서정시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자문위원.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현대시인상, 제12회 순천문학상 등 수상. 월간 《시문학》 발행인. 시인 문덕수의 부인. 2023. 2. 12 폐암으로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