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은 시인 / 옷장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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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은 시인 / 옷장
껍질 한 벌 옷걸이에 걸려 있다 몸피 마르던 날들을 지나 입술주머니 속 애벌레 혼잣말 되어 날아갈 때 숨소리 끝자락에 붙어 있던 라벨은 실밥이 뜯겼다 그가 가볍게 사라진 후 손가락 사이 밤을 비벼보면 오래 마른 허물처럼 별가루가 끝도 없이 날렸다
이희은 시인 / 비가 읽는 책
그 집 대문 앞에 버려진 묵은 책 한 권
헐은 모서리가 젖어들자 아무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 가만가만 새어 나오네
남몰래 살갗이 된 사람, 여백의 낙서는 붉은 통증으로 번지고 녹물 같은 목소리 어스름의 귓바퀴에 고이네
뜨거운 폭풍의 손길이 다녀간 듯 북- 길게 찢긴 곳, 책은 잠시 말을 잃기도 하네
우리는 무거운 파동을 맞추고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면서 행간 속 굳어있던 기억들을 천천히 풀어놓네
감추고 싶은 뒷면과 앞면이 축축하게 붙어버린 저녁 이미 저물어버린 감정으로 바람이 다음 생을 기웃거리네
읽다 만 페이지에 가름끈을 끼우면 젖은 책의 표지가 조금 더 헐거워지네
이희은 시인 / 자꾸 붉어져요
고요했던 창문 깨지고 마음에 한 번 더 핏물 흐르면
온 땅이 온 하늘이 붉어지려 해요
울면서 울면서 키가 크는 거라지만 강을 건너는 거라지만
저기 바람에 흔들리는 아스파라거스도 낡은 시집 속 책벌레도 소리 없는 소리로 울면서 새잎을 피우고 새로운 페이지를 읽는 거라지만
그래도 가슴속 깃발은 자꾸 붉어져요
느닷없이 먹구름 머리 위 드리워져도 튼튼했던 울타리 갑자기 헐렁해져도 길모퉁이 꽃집 화려했던 꽃잎들 한꺼번에 몸을 떨어도
울면서 울면서 겨울을 지나는 거라지만
흔들리는 총구 풀잎의 심장 겨누어도 울면서 울면서 총부리를 잡아야만 해도 새봄은 오고야 마는 거라지만
가끔은 웃었던 일 기억하면 또 가끔은 웃을 일도 생기는 거라지만
팽팽하던 하늘이 자꾸 붉어지려 해요 핏물이 보여요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월호 발표
이희은 시인 / 종이컵
미지근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꾸 온도가 내려가 줄거리는 바로 잊어버리지 담기는 것에 따라 이름은 달라지고 말이 비워질수록 단단함을 잃어가 비우지 못한 시간,바닥에 떨어져도 조각나 흩어지지는 않지만 샹들리에 불빛 아래 진열되지 못하고 막간을 살다가 끝나지 손을 잡고도 날 보려하지 않아,넌 실없는 향기 풀어놓고 바람이 물렁거리길 바라는 거니까 잠깐 젖는 것으로 만족해 내일 같은 건 약속 받지 못해도 구겨지지 않는 부활을 꿈꾸지
이희은 시인 / 자문자답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폐인이 되었을 거라고 답할 것 같네요 어쩌다 운이 좋았다면 아파트 부녀회장이라도 되었을까요 명절이면 구청에서 보내온 사과 박스나 한 되짜리 정종병에 기뻐하며 아마 지금보다 좀 바쁘게 살았겠지요 가끔 무슨 회의에도 참석해야 하니까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거든요 근데 웬 폐인이냐구요 이시겠지만 시인과 폐인은 깻잎 한 장 차이죠 아슬아슬 과녁을 비껴간 안타까운 화살을 깻잎이라고 해요 간 크게도 시인은 지구나 우주 그 사이 포진한 어둠 그 엄청난 과녁을 향해 시를 쏘아대지만 늘 깻잎이죠 밤낮으로 시위를 당기는 소리 천지간에 자욱한데 달도 별도 다 멀쩡해요 미농지 같은 어둠엔 실금 하나 가지 않았구요 가끔 조롱하듯 똥별이 헛손질하는 시인의 높은 이마 위에 멋진 한 획을 긋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네요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당신이 묻지 않으니 나는 부녀회장도 폐인도 될 수 없어요 찬밥에 물 말아 깻잎장아찌로 점심을 때우는 한없이 심심한 시인이지요
이희은 시인 / 커튼
밤새 죽었다가 꿈틀꿈틀, 아침을 여는 자벌레
주름진 사제복 벗듯 빛에게 자리를 내준다
네모난 풍경이 나타나고 자벌레의 키는 반쯤 줄었다
나뭇잎 냄새 속에서도 오와 열을 맞춘 네모, 네모, 네모들, 저마다 아침 닮은 자벌레 키우고 있을까 제 몸 끝까지 줄였다가 먼 길 떠날 수 있을까
사각사각 햇빛 갉아 먹으며
옆구리에 날개 돋는 듯 한껏 몸을 흔들어 보지만
풍경은 사라지고 자벌레는 서둘러 어둠을 풀어 놓는다
모든 신호 꺼버리고 벽으로 위장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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