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우 시인 / 근황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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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우 시인 / 근황
마시던 커피를 쏟았다 처음부터 빈 컵이었다 안도하는 내 옆에 있지도 않은 얼룩을 보고 놀라는 내가 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오늘 개밥을 줬던가? 곰곰 생각했다 내가 내 밖으로 나갔다면 일단 개 사료부터 챙길 일, 나가 애인을 만나려고 머리를 빗는 나를 내가 내 뒤에서 훔쳐본다
버스를 놓친 나는 혀를 차며 승강장에 서 있고 제 시간에 도착한 나는 좌석에 앉아 무심하게 안전벨트를 맨다 내가 나를 창밖으로 내다본다면 그때 나는 창을 연기하는 풍경이거나 풍경을 연기하는 오후쯤
나는 나를 삭제하는 데 늘 실패한다 덮어쓰기를 하시겠습니까? 오전의 내가 오후의 나를 지나치며 묻는다
어제와 내일, 이쪽과 저쪽의 내가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잔으로 커피를 마신다 내 안쪽으로 번지는 저 얼룩은 내가 엎지른 저녁일까 저녁이 엎지른 나일까
-시집 『저 달, 뒤꿈치가 없다』에서
박윤우 시인 /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묵은 이명씨(耳鳴氏)가 산다 오늘따라 내가 흔하다 나는 계단참이고 우산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풍경이다 우스운 일에만 웃는다
인적 드문 내소삿길, 인중 긴 꽃을 내려다보며 눈으로 만졌다 무슨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꽃 풀 먹인 모시적삼 깃동 같은 녀석에게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
거기, 매발톱 꽃은 폭발이 아니라 함몰이다
사월의 허리를 부축하는 미나리아재빗과 누두채(漏斗菜) 대궁 위의 푸른 뿔, 안으로 안으로 구부리는 푸른 화판 끼리끼리 붐비며 함몰 중이다
잎도 안 난 노루귀가 매발톱 따라 고개를 꺾는, 매발톱과 노루귀 사이 너를 묻으며 비를 맞았다
돌아와, 식은 밥에 물 말아먹고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지우는데, 이명씨(耳鳴氏)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느냐며 속삭인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에서
박윤우 시인 / 눈보라
블리자드, 물 건너온 말씀이다 자음동화가 없이도 보드랍다 바람찬 흥남부두에 흰색 한 소절 섞으면 동쪽이든 남쪽이든 눈보라 친다
제 무게만큼 고요하고 제 너울만큼 바람이 깃을 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이전부터 눈보라였던, 그 말씀 어디에 가파른 풍경이 도사려서 사납다는 누명을 뒤집어쓰나?
아버지의 술냄새 끝, 누수(漏水) 같은 잠결 속으로 막막한 것들이 막막하게 숨어드는데
지금 창밖에는 기척 없는 소란, 자세히 보면 모두 관절이 없는 것들, 전신이 통점이어서 낱낱이 흰 것들이다
선잠 든 아버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으시나 굳세어라 금순아를 외치시나 숨소리가 내리 엇박자다
전선야곡이 늦은 밤 가요무대를 적신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에서
박윤우 시인 / 가시엉겅퀴
가시없는 뻐꾹채 가시 없는 조뱅이 가시 없는 절굿대 그 옆에 가시 없는 수리취 또 그 옆에 샅샅이 가시 돋친 가시엉겅퀴
대궁서껀 이파리서껀 달빛 절이고
오르막을 생각하면 발목이 환해지고, 내리막을 생각하면 여울물소리가 들려 드문드문 초록 귓바퀴 돋고
물길어 쌀물 안친 죄, 햇빛 훔쳐 꽃 헹군 죄
유똥치마 자미사 본견 저고리에 자주 고름, 철벙철벙 개울물건너듯 건너가고
물은 흘러도 산그늘은 늘 제자리 뼘가웃 저녁 볕뉘 바람이 마름질하다 말고 가든 길을 마저 간다
가시 없는 뻐꾹채 가시 없는 조뱅이 가시 없는 절굿대 그 옆에 가시 없는 수리취, 또 그 옆에 샅샅이 가시 돋친 가시엉겅퀴
박윤우 시인 / 문득
책을 읽다가, 창밖을 내다보다가 거기, 문득 문득을 마중하는 개나리, 문득을 견디는 빨래
삐걱, 바람소리가 단잠 깨우는 그러니까 문득, 기어코 문득, 어쩌다가 문득, 문득이 문득을 열고 문득 속으로
샛노란 개나리가 샛노란 개나리를 못 본 척 마지막 꽃잎을 툭, 떨어뜨려 문득 중이던 내 등허리 실금이 환하다
빨아 널었던 문득을 걷어 서랍 속에 개켜 쟁이던 내가 무턱대고나 아무튼 같은 개 한 마리를 앞세우고 집을 나서려는데
비 올라, 서답 좀 걷어라!
경대 위에 걸어두었던 납작한 어머니가 내다보며 납작하게 문득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에서
박윤우 시인 / 대체공휴일을 던지다
수년 전 잉카트레일에서 마주쳤던 건 시가 아니라 계단식 밭과 돌담과 검게 탄 사내들의 얼굴이었다.
나지막한 키에 목이 짧은 그때 그 얼굴의 사내가 석촌호 화장실 뒤 공터에서 저글링을 하고 있다. 그가 던져 올리는 것은 치차병이 아니라 두 홉들이 소주병이다.
병 다음 공중, 공중 다음 병, 병은 세 개인데 손은 둘, 병이 네 개로 늘어도 손은 둘 뿐이다. 손이 병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병이 손을 따라다닌다.
티티카카호수 갈대배의 물질 소리, 마추픽추 마른 우물의 두레박 소리도 시는 아니었다. 지금 저 사내의 손 공부가 그렇듯이
부처가 주말에 다녀가서 월요일이 공휴일이 되는 나라,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의 대체공휴일을 먼 나라에서 온 저글러가 던져 올리고 있다.
그의 공중에는 받아내야 할 추락이 더 많고, 내 산책길에는 그렇다. 시보다 담배를 먼저 끊은 후회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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