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건우 시인 / 라자루스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7. 12:05

이건우 시인 / 라자루스

 

 

×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아끼는 것들을 생각한다

 

 미안합니다 의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의지만 있다면 없던 길도 뚫어낼 수 있습니다 이 개는 다시 움직일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 보세요 이곳은 어디입니까 말해보세요 들립니까

 

 하지만 선생님 없던 자리에서 생겨난 손은 제 소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손도 제 소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대로 눈을 감고 볼모가 된 밤을 견뎌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닥에 등을 내고누워 흐르는 대로 둔다

 

 ×

 

 볕이 잘 드는 베란다는 눈이 부시다 스위치를 켠다 제자리들이 애를 쓰고 있다

 

 우리는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개가 오래된 우리를 끌고 간다 숨을 삼킨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목줄을 쥔다 사랑하는 나의 개는 더 이상 나의 개가 아닌 것 같다 사랑하는 개가 낑낑거리며 나의 목덜미를 문다

 

 우리는 두꺼운 미래를 열고 투명한 호숫가에 머리를 박은 채 푸른 물을 마시곤 했다

 

 주머니 안쪽을 움켜쥐면 깨어나지 못한 먼 기척이 만져진다 나의 사랑하는 개가 멀리서 입가에 푸른 물이 묻은 채 잠들어 있는 나를 끌고 올 것임을 안다

 

 현관에 새로 산 목줄을 매어두었다 오래 전 일이다

 

 제자리들의 볕이 짙게 고이면 나는 고개를 내밀고 오래도록 사랑하는 개의 흉내를 낸다 나는 구겨진 주머니 속에 담겨 어두워진다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밤을 말하지 않고도 어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은 등은 켜지지 않는다 스위치를 끈다 켜지지 않던 등이 서서히 꺼진다 어떤 징후처럼 포개어지는 제자리들이 있다 짙고 푸른 미래가 찢어지고 있다

 

  ×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사랑하는 나의 개를 생각한다

 

 미안합니다 말하자면 잔상 같은 것입니다 눈을 감고 나서도 환한 제자리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모든 것의 볼모가 되는 일에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선생님 현관에 매어둔 목줄이 있습니다

 

 목덜미가 뒤집어진 주머니처럼 늘어져 있습니다 고개를 너무 오래 내밀고 있던 탓이 아니겠습니까 찢어진 미래를 열고 물을 마시러 가야 하겠습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기 보세요 푸르러지는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까 말해보세요 보입니까 이것은 어떤 징후가 아닙니다 그저

 

 보세요

 

 베란다는 볕이 잘 든다고 합니다

  

 ×

 

 우리는 멀리 되살아온다

 

 푸른 가슴 위에 우리의 두 손이 가지런하다

 

* 라자루스 현상(Lazarus syndrome)은 심폐소생술 실패 이후 사망 선고를 받은 환자의 호흡이나 맥박이 다시 소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라자루스 징후(Lazarus sign)는 뇌사 환자가 저산소에 의한 척수반사로 인해 자발적으로 손과 다리를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대개 팔꿈치를 굽혀 양손을 가슴 위로 교차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 『포엠포엠』 2021-가을(91)호

 

 


 

 

이건우 시인 / 허수아비의 기분

 

 

그 흔한 물음표도 내겐 없지

나는 길 바깥의 사람

허수아비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네

 

세상의 모든 의문사들은 너무 폭력적이지

자꾸만 명료해지길 원하므로

그래서 나는 길 바깥의 사람

갈래 없는 번짐

경계 없는 그늘

한가운데의 기분

나를 사로잡는 건 그런 것

 

그림자의 색깔 같은 것

검은색도 아니고 그 무엇의 색도아닌

색깔 없는 색깔의 기분

내겐 물음 대신 수많은 색깔들이 있지

이름은 모르지

 

그러나 나는 불가능한 문장

그 어떤 말로도 규정하지 못할 것

물음 없는 대답을 본 적 있는가

나는 길 바깥의 사람

애초에 내겐 갈 곳이 없네

 

그저 노래 불러줘

소리치지 않은 메아리처럼

낮에는 밤의 노래를

밤에는 낮의 노래를

슬프게

모르는 색깔을 덮고 잘 수 있게

 

나의 침대에도 무너지는 노을의 중얼거림이 들려올 수 있는가

예언처럼 노래처럼

메아리처럼

 

매일 밤

나는 귀로읽을 수 있네

 

 


 

 

이건우 시인 / 반동(反動)

겨울밤 좋아하는 내가

여름 한밤중에 깨어 있다.

온 나라 찜쪄먹을 듯

맹렬하던 기세가

입추 지나

갑자기 겸양을 떤다.

그에 따라

나도 반동적(反動的)이 된다.

쳐지고 늘어져도

강인한 태도로

여름과 대치했건만

왠지 나도 한 풀 꺾인다.

언젠가

아버지의 등이

노인의 그것처럼

보이던 날

아버지를

이겨 보겠다

당신을 넘어서겠다

박박대고 덤비던 녀석이

어깨동무 걸치는

오랜 친구 대하듯

반동적이 된 것처럼

삶은

반동(反動)인가

*반동(反動) :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작용시킬 때, 작용을 받은 물체가 똑같은 크기의 힘을 원래의 물체에 다시 미치는 작용

 

 


 

 

이건우 시인 / 백일몽(白日夢)

바람 한 점 없는 날

그림 같은 조각배에 누워

햇살은 따사롭고

호수 물결 잔잔하고

하늘엔 흰 구름 양 떼처럼 둥둥

저 멀리 초록 산천

내 마음을 다정히 다독인다.

모든 사물

제 자리에 단정하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시간에

거스름 하나 없다.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내 그것을 이루고

누린다.

꿈이어도 좋고

생시라도 좋은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완전한 평화

그러다 툭

무언가 살짝 부딪쳐

방금 전 누리던

그 완전한 평화

산산이 깨워준다.

화들짝

꿈인가

생시인가

깨졌다.

우습다.

 

 


 

 

이건우 시인 / 일상(日常)

올림픽 출전한

선수처럼

카메라 앞 연기하는

배우처럼

가진 기량과 재능

마음껏 뽐내고

펼쳐보인 후

후회없이

대회를 마치고

촬영을 마치고

제 집으로 돌아온다.

일말의 아쉬움 없이

신명나게 한 판 놀았으니

후련하다.

삶이 그러하듯

매순간의 경기에 연기에

진심을 다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4강 진출을 이뤄낸 김연경 선수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읽고 ...

 

 


 

 

『포엠포엠』 제14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이건우 시인 / 불가능한 오아시스

 

 

 우리가 선원처럼 탑승한 버스는 심하게 흔들렸다 덜컹이는 버스는 곧 우주로 떠나는 듯 나는 행성 같은 너의 뒷모습을 앞에 둔 채 아득한 멀미를 시작했다

 

 좌석 간의 거리, 너와 나 사이의 거리는 뭐든지 가능한 거리 코끼리도 들어갈 수 있고 아프리카도 들어갈 수 있고 사막도 들어갈 수 있는 거리 그리고 모래알만큼의 거리 모래 바람이 부는 거리 바람이 불면 우리는 타국의 깃발처럼 닿을 듯 펄럭이기도 하는데

 

 불가능한 거리, 나부끼는 너의 윤곽을 붙잡을 수 없다 실루엣뿐인 너는 눈을 비벼봐도 여전히 모호하고 닿을 수 없는 거리 손에 쥘 수 없는 너의 머리칼을 생각했다 흐르는 모래 사이로 너의 테두리를 어림잡는 중 샌드페이팅처럼 어루만지면 자꾸만 흐트러지고

 

 끝내 넘어갈 수 없는 테두리, 그 너머에는 오아시스가 있을까 오아시스는 푸를까 아지랑이처럼 버스는 덜컹이고 창문에는 어느덧 내가 비칠 만큼만 찾아온 밤 나 또한 모래처럼 흔들리는 윤곽뿐이고 나는 왜 나조차도 닿을 수 없을까 불가능한 거리와 불가능한 얼굴 나는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좌석 간 사막은 광막한 우주가 되고 나는 버려진 우주 미아처럼 멀미를 하는 중

 어서 착륙해야 해

 눈앞에는 오아시스처럼 푸른 행성의 뒷모습이,

 우리는 이미 정류장에 내려 있었다

 너는 나의 불가피한 고향별, 불시착한

 나는 아주 잠깐 영원히 있다 갈 것이다

 

 


 

이건우 시인

1996년 울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윤리교육학과. 2018년 계간《포엠포엠》 제14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