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시인 / 관찰자 효과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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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시인 / 관찰자 효과
순서는 돌아오고 삼차원은 몸살을 앓는다, 목련의 삼일 천하 세월의 방식이 남루해도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빗소리의 가난 같은 것을 발견한 후에 더 깊어졌다 일을 치른 그 공허의 무게에 이끌려 한참을 쳐다봐도 한결같은 비의 질서에 비해 염치없는 짓이다 한순간 꽃의 멸망은 잊고 순백의 하루를 더 견딘들 빈집처럼 보이는 나무, 시간이 떠나는 법은 바뀌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고 싶은 것들만 떠나려는 물방울에 모서리를 만들고 있다 손 놓고 은신 중인 내 사랑은 택도 없다 어눌한 다른 봄을 노리고 있다는 말도 들렸다 운용할 눈을 못 찾고 삐걱거리는 관찰자만 있게 한다 그러나 강물을 앞세우는 심정으로 다시 들으니 나를 두드리는 가슴의 탁란을 듣게 되었다 이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이슬이 비친다는 말, 목숨이 살을 분별하여 세상에 내어놓는 방식 말이다 뿌리에서 올라온 물이 기어이 첫 봉오리에 닿는 날, 하늘이 햇볕을 보내는 건 마땅하다 우주의 질서는 시간처럼 정확해 간 뒤의 순서가 온 것이지만 나는 늙고 격의 효과는 살아 있다
-시집 <백 년의 내간체>에서
이정모 시인 / 시간을 걱정하다
사랑하나 남기기로 사소한 변명 따위는 잃어버리는 게 무슨 대수랴 가슴에 향기를 품은 시간은 끝이 나도 최선일 뿐 오늘도 매서운 바람에 절망하는 생들이 낭비되고 아,봄이 떠나는 것을 못이기는 척 바라보네 쉬 내어 준 가슴이 가벼움의 힘으로 꽃을 피우네
이제 서리 내려 목이 꺾이니 하늘을 보겠지 어둠을 지나 온 감자 꽃이 하얗게 웃던 시간은 고요하겠지 외로우니까,가야할 길이 아득하니까 내 안의 바람이 내 것이 된 것이네
우리가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봄의 본문을 다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네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에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네 앓고 또 앓아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시의 끈을 잡고 뻐꾸기처럼 서럽게 우네 더는 산 채로 갈 수 없는 꿈 주는 것보다 가져가는 것이 많으나 버릴 수 없는 혈육 같은 것이네 불가분의 당신,나의 바람조차 먹어치웠으니 골 깊이 덜어진 삶을 위해 아무래도 내 영혼을 눈물로 이어야겠네
이정모 시인 / 파도·1
철썩거리지 않아도 안다 철들 때 알아차린 비릿한 몸짓 끊임없이 밀어내지만
우우우 우려하지 말라는 소리 대신 자지러지는 하얀 웃음 지천에 깔아놓고 대놓고 하는 바다와 육지의 교합
언제나 성공이다 망가질수록 황홀한 소리를 낸다 바람이 중얼거리며 지나간다
-시집 <기억의 귀>에서
이정모 시인 / 바람에 다 털리고
얼마나 가벼운지 바람에 다 털리고 그대에게 없다는 것 줘버리거나 털리거나 사라졌다는 생각 새끼들 마냥 떠나가고 그득했던 것들이 비워진 통은 가볍다 그러나 지고 가던 물통에서 떨어진 물이 길섶의 풀을 살린다 이때 햇살은 오래도록 머물 것이니 섭섭하다는 것은 떨어져 나간 뒤를 보라는 말일 것이다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 2022.01.11.
이정모 시인 / 등대
이것은 밝히는 것이 아니라 껍질을 벗기는 것이지
더는 뛰지 않는 심장의 느슨함을 벗기고 당신도 벗기고 어둠조차 벗기는 것이지
이것은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안광으로 당신을 묶으려는 끈이지
몸이 키운 열정을 마음이 뿜어내는 것이고 꽃같이 달아올랐던 시절을 단단히 연결하는 것이지
그 끈으로 파도소리 두르고 밤하늘에 걸어 논 환한 치마폭이지
그래 그래야 빛이지 그냥 비추기만 해서야 사랑이 아니지
해종일 신열에 달뜬 바다를 탕탕, 항구로 끌어오는 통통배 뱃길에 복사꽃 환하게 뿌리는 것이고
어둠을 벗겨내듯 일과를 걷어낸 후 어촌의 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지
이렇게라도 어둠을 붙들려는 것은 혹여 허공에서 길을 잃은 아침이 오지 않을까봐 새벽까지 버티려는 마음 때문이지
정은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곳에서 끝내 그리움으로 다시 시작한다고
불같은 사무침을 물낯에 드리우는 것이고,
이정모 시인 / 겨울밤
정월 초사흘 날 삼경 사묵사묵 눈뜨고 있는 새하얀 절집 이 적막을 누가 데려갈꼬
잠못드는 저 손(客)아 애 끓이지 마라
이제 곧 신새벽이면 까치 한 마리 고요를 헤집어 망개 열매 거두어가니
그뿐이랴, 잎 지는 소리 하나 없는 그런 밤이면 눈송이 하나하나 인기척이다
결코 내생이 슬어놓은 상처마다 기척 내는 시 한 소절 못지않다
그러나 그립다 시가 밥 멕여주나 자식 밥걱정하던 엄마의 일성
가만, 독거로 부려놓은게 아니다 내 가슴에 적막 한 상 걸게 차린 것이다
가난에 치여 방구석에 쪼그라든 시를 이삿짐처럼 끌고 다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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