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여림 시인 / 나는 집으로 간다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8. 13:03

여림 시인 / 나는 집으로 간다

 

 

몇 번이나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햇살에도 걸리고 횡단보도 신호등에도 걸려

자잘한 잡품들을 길거리에 늘어놓고 초라한

눈빛으로 행인들을 응시하는 잡상인처럼

나는 무릎을 포개고 앉아 견뎌온 생애와

버텨가야 할 생계를 간단없이 생각했다

해가 지고 구름이 떠오르고 이윽고

밥풀처럼 입술 주위로 묻어나던 싸라기눈

아줌마 여기 소주한병 주세요.

나는 석유 난로 그을음 자욱한 포장마차에 앉아

가락국수 한 그릇을 반찬 삼은 저녁을 먹는다

둘러보면 모두들 살붙이 같고 피붙인 사람들

포장 틈새로 스며드는 살바람에 찬 손 가득

깨진 유리병 같은 소주 몇 잔을 털어 넣고

구겨진 지폐처럼 등이 굽어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오랜 친구처럼

한두 마디 인사라도 허물없이 건네고 싶어진다

 

포장을 걷으면 환하고 따뜻한 길

좀 전에 내린 것은 눈이 아니라 별이었구나

옷자락에 묻어나는 별들의 사금파리

멀리 집의 불빛이 소혹성처럼 둥글다

 

 


 

 

여림 시인 / 사막을 낙타가 건너는 법

 

 

끊임없이 걷는다. 복도 이끝에서 저끝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일정한 보폭으로 사람들 사이를 피해 다니기도 한다.

눈가에 내려선 안경을 한 손으로 치켜 올린다.

 

어린 왕자의 발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금빛 뱀은 어디 있는 것일까

허물어질 듯한 담장에 걸터앉아 어머니의

한숨과 아버지의 눈물을 생각했었다.

이 몸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어.

섬세하게 찢어지는 선인장 가시에 찔려 가족들의 실핏줄 부분이 엉긴

영사처럼 펼쳐지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뿌리도 없이 내리고

눈내리는 시베리아 벌판

나는 가장 추운 사막길을 걷고 있었다

 

 


 

 

여림 시인 / 네가 떠나고

 

 

네가 떠나고, 네가 없어지고, 네가 사라지고

난 뒤부터

나는 내 몸 밖에 있는 세상을 죽여버렸다.

죽음이 그리고 살해가 두렵지는 않았다. 죽지 않기 위해

죽이기 위해 버둥거리고 뒤치락거렸던 감촉이 남아

있는 내 몸이 무서웠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늘 보고 있었고 늘 듣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한번도 녹지 않았던 깊은 계곡의 흰 눈처럼

나의 가장 깊은 함정과도 같은 숨겨진 곳에서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에게만 왔다.

 

끝을 알 수 없는 꼬불꼬불한 골목의 미로에서

나지막하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리는 노는 아이들

소리처럼

내 귀는 물 속 같은 나의 몸을 지나 바닥에서

소리를 찾는다, 소리를 기록한다.

 

미치광이의 시선이 날아가는 곳

이미 이 세상엔 없듯이, 자기의 속만 들여다보는,

오로지 번들거리고 미끈거리는 자신의 내장만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처럼 내 눈은

나의 내장들이 꿈틀거림을 골똘하게 쳐다보았다.

 

네가 떠나고, 네가 없어지고, 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

지고

난 뒤부터 나는 안다.

나는 내 몸 밖에서는 다시는 너를 찾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내 눈이나 내 귀 내 손가락이나 내 발가락들이

너를 거머쥘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것, 알 수 없는 것이

내 몸의 어떤 부분에서 탄생하고

환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여림 시인 /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

 

 

바다를 본 기억이 없다 분명 기억 속의 그 도시엔 바다가 있었는데 난

바다를 본 기억이 없다

 

횡단보도였지

차들이 소음을 지르며 질주하고

행인들이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햇살은 부시도록 선명했는데

가게 앞 의자에 앉아 혼자 울 뻔했었다

살아 있다니

...그건

참으로 끔찍하기까지 한 현실이었다

 

울지 않으려 차창으로만 시선을 두다가 일시에 날아오르는 새떼를 보았지

황망하게도

그 풍경이 나를 울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웃거나 혹은 뒤척이면서 지내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런 모습이 또 서글퍼 보이기도 하더군

할 말이 너무 많아서일까?

웃다 울다 바보처럼 돌아서 왔다

 

그리운 사람,

때로 너무 생각이 간절해져서 전화조차 버거웠다면 쓸쓸히 웃을까?

보고 싶어서 컴퓨터 자판 위에 놓인 손가락들을 본다

그런데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

그리운 사람

조금씩만 서로 미워하며 살자

눈엔 술을 담고 술엔 마음을 담기로

 

 


 

 

여림 시인 / 마석우리 詩 1

 

 

이 길이 끝날 즈음에 네가 서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창문을 열면 한 폭의 들판이 풍경화가 되던 집

그 속에서 양떼나 치고 밭이나 가는 생애도

힘겹지만 아름다울 것이라고 혼잣말을 했었다

노을이 내리고 양떼를 몰고 내려오는 산골짝마다

첫눈처럼 만종이 은은할 적이면 먼 데 있는

친구의 안부를 묻듯 하늘을 향해 눈인사라도 하며

그립도록 따뜻한 마을의 불빛을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처럼 오래 바라다보고 싶었다

 

풍경이 지워진 들판 끝에서 기다려다오, 봉화가 핀다

 

 


 

 

여림 시인 / 1999년 2월 3일, 아침 04시 40분

 

 

나는 절망한다

아니,

절망도 아닌 그 무엇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나가시고 나는,

갈수록 흐려지는 눈을 헤집으며 여기 앉았다

이빨을 지그시 짓누르는 삶의 회한들

그러고도 모자란 듯 호흡은 갈수록 나를 괴롭힌다

시를 쓰는 자들의 영특함, 혹은 영악함

자신과의 어떤 축, 혹은 성을 구축하려는 모습이

눈을 감고 그 눈 속이 쓰릴 만큼 아프다

나는 꿈을 이루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을 따름이지 시인으로서 굳이

어떤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림 시인 (1966~2002)

1966년 경남 거제 출생. 본명: 여영진. 서울예전 문창과 중퇴. 스승이었던 최하림 시인의 이름 끝자를 빌려 필명을 여림이라고 지음.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했지만 2002년 11월 16일 타계. 이후 문우들이 시인의 작품을 모아 2003년도에 유고시집 『안개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를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