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시인 / 돌을 던졌다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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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형 시인 / 돌을 던졌다 돌의 영혼은 돌에게 돌아간다 돌의 내부에 돌처렴 생긴 뭉치가 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던질 돌을 쥐었다 누구도 귓속에 박힌 영혼의 일부를 모른다 돌의 형상만 생각했다 왜 귀는 입구가 되었나 귀 없는 돌들이여 영원히 해체되지 않는 몸의 모서리만 계속해서 벗기고 있구나 조금씩 돌을 비춘다 나는 이제 돌을 탐구하는 뒷면 축축하고 붉은 뒷면 그러니까 돌과 돌에게 옮겨가는 굳센 표정 뒤따르는 무리가 된다는 것이지 돌은 잠시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다가 '이제 가라앉자' 하고 영혼의 무게만큼 자기를 굴린다 나는 돌에게 빠져들고 유리창 같은 수면을 향해 머리부터 박는다 숨을 쉬어도 나는 해체되지 않나 올라와줄까 발도 목도 같은 포즈 단단함 조금씩 돌과 나의 훈련
김기형 시인 / 어지러운 마음이 내려가는 모양
저 골목은 밤으로 난 길이다 이 산책은 자신을 분지르는 공식적 일과 가로등올 세면서 가로등을 치받는 날벌레를 동경하면서 지구 밖의 불빛, 부분을 만진다 바다를 건져주는 것 오후의 중오 오후의 설움 하얗다못해 발광하는 그 빛은 무엇이었나 거리의 간판은 지시문으로 되어 있다 나의 사명은 시작되고 횐고래 수염처렴 색깔 없는 발등처렴 아 떠나지, 가지, 물러서는 신의 발은 잦은 물결 어둠 속올 간파하는 나의 체온은 죽듯이 떨어진다 낮아지기도 하고 오르기도 하는 소리 뒤로 불안이 매달린 넝쿨 간신히 숨을 쉬고 있다 걸을수록 행성들이 떠오른다 오른손이 왼손을 붙잡는 일촉즉발은 쉽고 삼킨 물건이 기도를 지닌다 스스스 무엇이 지나가고 있나 그러니까 눈인사를 하며 사라지는 표정을 아무 저항도 없이 나는 녹이고 녹고
-시집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김기형 시인 / 슬픈 얼굴
새의 발 캄캄한 거리 슬픈 얼굴이요 굽은 목
어떤 얼굴로 걸어가느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슬픈 얼굴이요
빗속에 얼굴을 풀고 있어 가만히 벌어지는 캄캄한 거리에 별이 놓이듯이 빵 조각을 떨구며 지나가듯이
부러진 나무들이 걸어가고 있어 한 발을 들면 바로 뛰어내릴 수 있는 격한 보폭으로
비밀로 들어갈 수 있어 발을 덮을 수 있어 같이 구르는 얼굴에는 인사가 없네 나는 슬픈 얼굴을 바라봐 가끔 깨진 채 떨어진 별의 조각을 입안에 담기도 해 슬픈 얼굴이 환하기도 하지
돌아가는 풍경을 봐 천사처럼 있으려고 오래 이야기를 하려고
함께 모인다 오래 무릎을 꿇고 정성스럽게 내 슬퍼진 얼굴을 만져 슬픈 얼굴은 말을 할 수 없는데, '검은 몸은 슬퍼요'라고 터져나오는 말을 '슬픈 몸은 검어요'라고 겨우 옮길 뿐
김기형 시인 / 빛이 지나가는 우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맑은 것과 밝은 것을 혼동하지 않고 닿고 있는 손가락의 감촉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고 한참 당겨도 손에서 손인 것을 알고 이름을 대신해 어두워지고 내일 대신 기록을 믿는
약속된 나무 아래 나무의 속도 아래 부러지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세 번을 생각하면 네 번이 오고 반대 방향을 허용하지 않고 레일처럼 달린다 침착하게 흔든다 전진, 숨 없는 물속처럼 전진
무엇을 닮았나 떨어진 낙엽을 모은다 소복이 쌓으면 기원처럼 일제히 간다 얼굴이 온도가 목소리가 간다 간다고 해, 뒤가 없다고 해, 피맛이 나, 무엇을 깨물었을까, 뛴다고 해, 아직도 공중 너무 가볍다고 해, 마음껏 웃었다고 해, 이것 봐, 보라고 해, 어쩜 아무 냄새도 없이! 소리치는 사람을 만난다 소리지는 사람이, 소리치는 사람이었어? 좁은 곳이 없다 밤을 새워서 오고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온다 계속 계속 계속계속 모른다
빈손이 앞에 떨어진다 다친 손을 주무른다
김기형 시인 / 창을 깨요 허리까지 벽이 자랐습니다 안은 터지는 물을 내보내요 가끔씩 왼발이 둥둥 들려서 숨을 참는 연습 젖는 연습 두려운 연습을 하면서 누구의 집에 들어섰을까 나는 반만 일기에 담았습니다 어디를 돌고 돌아왔을까 무엇을 뒤집고 왔을까 잃지 않은 기억과 잃은 기억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크나큰 일이 되어서 분명한 사실로 도착하려고 합니다 부쩍 건조한 풍경 매일 돌아서는 연습 고개 든 정면은 점점 다른 온도 큰 산이 놓이듯 해요 산짐승들을 불러들여 산을 뒤집어 보려 해요 박차고 나가고 박차고 나가서 언제나 ‘그곳에 없다’는 대답만 하고 싶습니다 몸에서 길게 자란 팔이 손을 만들어서 허둥대고 있어요 나를 뒤지고 있어요 불쑥 골목이 만들어질 겁니다 나는 울다가 나왔습니까? 도망치는 중인가요 하얗게 늙는 골목인데요 그러니까 창을 깨요 아가미를 열어요 알아봐야 합니다 큰 파도 덮쳐서 눈코입이 없어진 자만이 진짜입니다
김기형 시인 / 양들에게 고백하기
하얀 등에 이슬 내려앉았네. 너희들이 잠들면 세상이 다 따뜻해진다. 나는 그 옛날 목동처럼 울타리에 기대 밤과 양의 조화를 생각하고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 온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언젠가 숨어 살던 시절에 양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도마 위의 것들을 거침없이 썰었다. 어느 날은 셀러리 어느 날은 누군가의 다리 같았지. 주저앉은 자들을 볼 때마다 참회해야 한단다. 세상에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골목으로 불러내 두들겨 팬다. 악악 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나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 두었지만 어쩐지 잔인한 일은 벌어지지 않고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오지 않겠니. 한걸음에 달려 들판 넓고 흰 양이 떼 지어 사는 이곳으로 도망쳐 왔지. 양들이 생각보다 고집이 세고 사나워 매일 목동의 애간장을 태운다고 하니, 나는 숙제를 찾는 사람처럼 양들에게 달려온 것이다.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다. 양들을 한 마리 두 마리 셀 때 맨 마지막에 내 가슴을 툭 치며 숫자를 높일 때 내일도 이슬을 맞고 서서 잃은 양 한 마리는 신을 찾고 있다가 잠 못 자고 또 세고 세고 한다는 말을 양들에게 하면서 나도 똑같네 너도 똑같네 커다란 양 무리, 불침번을 서는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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