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갑수 시인 / 소유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9. 17:11

이갑수 시인 / 소유

 

 

내가 소유하였던 세월에서

나는 소유하려고만 하였지

내가 누구의 소유이리라고는 생각 한 바 없다

 

나는 처음부터 나였다.

나는 내게 늘 가장 알맞았다

세상은 내 것과 내것 아닌 것 둘로 나눌 수 있었다

아마 나는 내가 아닐 때까지 그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나를 소유하지 못했더라면

 

라면도 있고 의자도 있고 간판도 있고

새, 돌, 꽃, 나무, 짐승, 쓰레기가 있었다.

세상은 내 것과 네 것만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산 채로 공중에 묻혀 있다

내가 소유한다고 믿는 땅에 걸음을 세우니

지하로 갈 예고라도 하는 듯

검은 그림자가 나를 찾는다

 

그림자 경계 위의 여기는 물질의 세계

더할수록 검어지는 색의 세계

검은 그림자를 보매

옷도 호주머니도 몸도 내장도 구별되지 않는다

 

땅이 소유하는 허공에

그림자가 나를 수직으로 세워 놓는다

발끝에서부터 땅이 내 몸을 가진다

 

 


 

 

이갑수 시인 / 마음의 구조

 

 

1

나는 학교로 갔었다

고인돌이 놓인 산모롱이 지나서 곧바로

이제 곧 분교가 될 궁한 형편에 놓인

시골 국민학교를 나는 지금 말하고 있다

파란 잉크로 처음 내 이름 석 자를

학적부에 기입해 준 완대국민학교,

청춘의 플라타너스 울타리 안에

지금은 콘크리트 하얀 슬래브지만

예전엔 새까만 송판으로 벽한 틈으로

풍금소리 울려 나오던 목조건물

3교시 학교종이 땡땡땡 울릴 때까지

어깨 맞대고 기대어 겨울 햇살을 쬐기도 했지

그때 빡빡머리의 나는 너무 가벼워

바람에 불려 가기도 했고 구름에 매달려

다녔다고 하더라도 전혀 엉터리가 아닐 게다

지금에 와서 눈에 힘주고 보면

하늘과 소매는 도화지 한 장 속의 그림

제대로 다 맞는 기억 속의 기억인 것을

태워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품으로 손 흔들지만

새나라택시와 화물 트럭이 모른 제 문지르고

그냥 가는 자갈길 옆 뽀얀 먼지 묻은 코스모스

고추잠자리를 잡으려다 놓쳤다

그러나 어디 내가 놓친 게 그것뿐일까

오늘에사 돌이켜보면 잠자리를 잡으려던

그 마음까지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기에

옛날로 통한 문으로 다시는 들어갈 수 없다

제사지낸 날 아침 책보 메고 가려는데

할머니는 내내 물컹한 무우전만 골라 맛있게

들고 계셨다 그게 아주 이상해

이 담에 어른이 되더라도 역시

단 고구마나 좋아해야지, 교실에까지 그 생각을

海印寺에서 사온 나무 필통에 넣어

그대로 달그락달그락 가져갔던 기억이

선뜻한 가슴으로 문득 떠올랐다

오르막 비탈길을 가는데도 어쩐지

막 내려가는 기분 속에서 새삼스럽게

작년 가을 벌초 때 갔었는데

껌정고무신을 녹여 부은 듯

시꺼멓게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2

학교로 가던 내가 있었다.

책보따리 어깨에 질러 메고

동무 동무 씨동무들과

봇도랑도 따르며 보리 새싹도 밟으며

시끄럽게 가느라 가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낡은 칠판 아래 양초 칠한 나무바닥 교실

국어시간에 합창하며 처음 배운 말은

어머니. 아버지.

소주 댓병에서 벼메뚜기 꼬챙이로 꺼내듯

아무리 기억을 자반같이 뒤적이며 내어도

지금의 모습은 그곳 어디에도 얼씬거리지 않지만

곶감 빼먹듯 나이만 빼먹고는

한아름 꽃다발 빛나는 졸업장 받고서

아우들과 정든 교실, 여학생들이 붙들고 울던

교문을 이제 뛰쳐나오고 보니

막상 정말로 익히고 알아야 할 것들이

미끄러질 듯 달려와 차례차례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일년에 한 번 그 할머니 제사 때마다

구들장처럼 펑퍼짐해진 궁둥이 치켜들고

항아리 따루듯 조심조심 절하면서도

간다, 는 게 대체 무엇을 뜻함인지

있다. 라는 건 또 도대체 어떤 것을 이름인지

새끼처럼 꼬인 그것들이 어쩐지

飮福할 때마다 자꾸자꾸 궁금해지는 것은

 

 


 

 

이갑수 시인 / 귀

 

 

전설같은 저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히 여겼더니

 

달팽이 같은 바로 바깥 둘레에

 

투덜투덜 내가 다닥다닥 붙어 있네

 

불평으로 불어터진 살을 뒤집어쓰고 있네

 

물컹한 살이 바로 나일 줄이야!

 

 


 

 

이갑수 시인 / 우리나라 글들의 풍경

-말은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

 

​​

글에는 표정이 있다

우리나라 글자에는 풍경이 숨어 있다

(한글은 표의문자가 아닐까?)

개울 모래 자갈 돌 물, 개울물 속 모래자갈돌

굴러 흘러 내려가는 소리 리을이 꼬부자져 졸졸졸

마을, 마음들이 모여 살고 부드러운 말씨로 줄이면 말

부드럽다, 는 부드럽다

손, 길고 짧고 펴고 구부린 것 그리고 강조되는 엄지

과연 하나도 모자라지 않는 5획으로

옷, 옷 입고 씩씩하게 두 팔 흔들면서

두 발로 걸어가는 사람 모습을 사실적으로 인상 깊게

몸, 옷에 꼭 맞게 들어앉은 신체

과감한 생략과 극도의 절제를 구사한 추상 조각품

뫼, 몸이 아랫도리를 걷고 의자에 앉아 있는 듯

가뿐하게 올라 피곤을 걷는 등산객이 쉬고 있는 것 같군

묘, 나무요 깔고 하나로 접어 허공에 누운

몸과 마음이 묘하기만 하네

ㅡ글은 존재의 건물이다

-시집, '神은 망했다' (민음사)

 

 


 

 

이갑수 시인 / 한낮

 

 

오징어라도 구으려는 듯 햇빛 쨍쨍한

실업의 한낮, 불암산 오르다

가문 개울가 뾰족돌에 갇힌 움푹 웅덩이

하필이면 눈길이 찾아가다

발 헛디뎌 넘어지려는 것을

남은 쪽이 긴장하며 간신히 중심을 되찾았다

발이 잘못했는데 왜 몸까지 무너지자는 걸까

해묵은 질문이 자꾸 걸음을 더디게 했다

해는 짧아 고단한 아내가 벌써 돌아올 시간

없는 상처에도 절뚝절뚝 시늉하며 내려오다

구경하지 못한 넘어진 이후가

새삼스레 궁금하기도 하였다

나머지도 마저 헛것으로 만들어 볼걸

불암산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돌멩이 하나 일으켜 던지니

가까이에서 누가 잘 받았다고 소리친다

상계역을 출발하여 시내로 들어가는

전동차가 멀리서도 씩씩하게 보였다

 

 


 

 

이갑수 시인 / 이제부터

 

 

서른까지 내겐 宗敎가 없었다

梵魚寺로 소풍도 가고

교회 옆으로 이사간 적도 있었지만

지금도 信仰을 가진 건 아니나

이제사 卍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알았다

 

서른이 되도록 親舊가 없었다

잘못 선택한 專攻은 난해해서

흐린 날의 핑계로나 좋을 뿐

가방을 엎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바깥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쪘지만

나를 變化시킨 이는 아무도 없었다

不幸히도 나는 스승을 유혹하지 못했다

 

나는 누구였던가

아침마다 거울을 쳐다보고

여행 가서 찍은 사진도 들춰보지만

그건 이미 지나가 버렸거나

마음 없는 모습일 터

결국 남이 본 나였을 것이다

누가 이름을 불러주면 뒤돌아보지만

나는 지금도 내 얼굴을 정확히 모른다

 

아직까지 나의 삶을 파악하지 못했다

중심은 그곳으로 뻗었는지 그저 앞으로만 간다

어느 날 海雲臺에 이르러

고운 백사장에 이름을 써보았지만

큰 손바닥이 와서 금세 가져가 버리더라

 

되돌아보면 지나간 것들은

모두 어디론가 숨었다

그것들을 모두 찾을 때까지

나의 그림자집, 陰宅에 입주하지 못하지만

최근 나는 無心코 내뱉는 말들

우리말의 경건성에 대해

진정眞情 놀라고 있다

 

 


 

이갑수(李甲洙) 시인

1959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대 식물학과 졸업.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1991년 제1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시집 <신은 망했다> <현대적>. 자연과학 전공자라는 학력 때문에 민음사에 픽업돼 '92년부터 과학전문 출판기획자로 활동함. '사이언스 북스' '민음사' 편집부장 역임. 궁리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