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연 시인 / 고인돌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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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시인 / 고인돌
당신의 집이 좋아 창문 하나 없는 벽에 귀 기울이면 이야기 소리 들려오는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고 커다란 지붕만 하나 얹은 당신의 집
오랜 세월 고요한 이끼에 싸인 당신의 집에 기대면
청동거울에 비친 하늘이 쨍하고 반짝이는 소리 민무늬항아리에 차르륵 곡식낟알 쏟아지는 소리 돌화살촉이 들판을 가르며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
하늘과 강, 들판의 소리들이 울타리 없는 당신의 집으로 속속 들어가 앉아 글자 없는 이야기책을 만들었는지 몰라
삶과 죽음을 한 몸에 품던 동검의 날이 비파형으로 잠든 곳 돌을 떼어 쓰는 일상이 역사가 되어 웅장한 지붕이 된 곳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이 너무 가볍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등을 내주는 당신의 집
들판을 마당으로 끌어들여 누구라도 잠시 이야기를 듣고 갈 수 있는,
여기 산수리 신대마을 왕바위재에 터를 잡은 당신의 집에는 지금도 작가미상의 이야기들이 하루종일 새어나오고 있어
-시집 <어떤 이유> 에서
박혜연 시인 / 바다, 여수바다
뜨거운 바다에서 열꽃이 터져. 나는 자궁 깊숙이 숨은 빈 방에서 나팔을 불어. 양생의 단전을 지나 뜨거운 나의 아래 낮고 넓은 골반에 뿌리 내린 꽃숨 끌어올려 얼굴 발개지도록 나팔을 불어. 기억하지, 내 몸에서 처음 꽃이 터지던 날 어머니 그 꽃잎 곱게 받아 두툼한 책갈피 사이에 모셔 두었지. 딸아, 꽃 피웠으니 너도 꽃밭이다. 꽃씨 받아 싹틔울 귀하디귀한 꽃밭이다. 축복의 주술로 어머니 내 꽃밭 오래오래 쓸어 주셨지. 나는 꽃씨였다가 꽃이었다가 풍성한 꽃밭을 꿈꾸는 바다였다가, 밀물 들면 꿈의 해수면이 차오르고 썰물 지면 보름달을 품는 여수바다였다가, 내 꽃밭에 처음 꽃이 피던 그 날
나는 신의 나팔소리 들었어.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나팔소리 들었어. 맞울림 하는 내 몸 안에 바다가 있어. 그래, 나는 바다야.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마다 만선의 붉은 깃발 단 배가 귀항하는 꽃밭이야, 꽃밭.
-시집 <붉은 활주로>에서
박혜연 시인 / 눈사람
온몸에 살얼음이 꼈어요 조금만 움직여도 서걱서걱 혈관을 타고 돌아요 태생부터 피의 균형이 잘못된 나는 하루하루 백혈구 수치에 목메었어요 사람들은 나의 동글동글한 웃음과 하얀 몸을 사랑하죠 눈이 오면 신이 나서 나를 굴려 양지바른 곳에 두려 해요 그런데 어쩌죠 난 처음부터 눈밭을 굴러서 태어난, 사람 나무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북풍과 가녀린 새의 발목을 잡는 차가운 눈발이 나의 탯자리인 걸요 이 살벌한 눈밭에서 백혈구 수치를 높이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해요 사람들이 주는 잠깐의 친절은 내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해요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내가 살거든요 달달달 치가 떨리는 영하의 추위가 나의 계절이거든요 새벽에 눈 떠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어도 두 눈 질끈 감고 따뜻한 남쪽을 지워야 해요 눈발이 그치면, 눈발이 그치면, 세상 가뭇없어요
그런데 가만 거기 눈발 속에 서 있는 당신 혹시 당신도?
-시집 <어떤 이유>에서
박혜연 시인 / 작심 게장
게장 백반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작심 독서실’ 간판을 보면서 우리들 ‘작심삼일’이 생각나 한참을 웃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저 이름을 거리에 건 이는 누구일까 마음을 단단히 먹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유효기간이 삼일일까를 생각하며 작심에 대해 우리는 작심한 듯 열변을 토했다
밥상 위 간장게장은 작심하고 우리 앞에 딱지를 벌리고 누웠다 거친 바다를 몸으로 막아내던 그 딱딱한 등딱지를 얇게 삭혀 내린 간장게장에서 작심한 듯 짭조름한 향이 났다
마음 단단히 먹고 덤벼야 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백전백패 단 한 번의 승리도 없을 것이다 돌아서면 금방 물렁해지는 마음 안쪽, 나도 작심하고 나를 다 내려놓을 것이다
물렁해지지 않으면 스며들지 못하는 세상, 물컹물컹 건너다보니 한 세월이 다 건너간다
제 살과 껍질 내려놓은 간장게장 작심이 입맛을 돋우는 저녁, 물러지지 않고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그렇게 한 세상 저물어도 좋겠다
-시집 <어떤 이유>에서
박혜연 시인 / 와온석양
하늘이 바다로 내려오고 있다. 바다는 부드러운 계단을 만들며 길을 내어준다.
붉은 마침표가 산과 산 사이에 찍히고 꽃무늬 보자기에 뻘밭을 통째로 담고 있다.
여기서는 울지 않아도 찰박찰박 길을 내며 바다로 돌아갈 수 있다.
내가 내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꽃섬 몇 개 징검다리 삼아 바다가 돌아가고 있다.
멀리 겹겹이 서 있는 산도 제 몸을 땅에 두고 하늘을 넘어가고 있다.
박혜연 시인 / 나의 별자리
삶이 라면박스 안에 갇힌 병아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벽 너머 꿈을 생각할 때면 하루에 한 번씩 죽어요. 그렇다고 너무 큰 걱정은 말아요. 아직까지 정말 죽어 본 적은 없으니까요. 단지 라면박스 위로 보이는 하늘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 나를 품었던 것이 뜨거운 형광 불빛이었는지 따뜻한 문장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가끔 손바닥만 한 하늘이지만 내 별자리를 찾아요. 불꽃이 쏟아지는 사자자리,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병자리, 고집불통 전갈자리까지 멀리서 빛나는 하늘, 눈이 작아서일까요, 내 별자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요. 나를 인공 수정시킨 차가운 피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은 밤, 안드로메다 공주를 태우고 힘차게 달리는 검은 말 페가수스가 되고 싶어요. 그런 밤 혼자서 뜨거운 별 하나 낳아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깃털 자꾸 겨드랑이를 간지럽혀요 어머니, 붉은 하늘을 베고 나를 다시 기록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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