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정 시인 / 청려장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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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정 시인 / 청려장
지팡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여름이 자라고 있다 명아주잎이 물컹하고 비릿하게
매미는 새보다 일찍 일어난다 가로등이 햇빛처럼 비추는 나무 아래서 좋아하는 것들 틈에서
여름이 자라고 있다 초록의 질투는 뿔처럼 여린 죽순에 받힌 송아지가 여름을 마주 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네가 쥐고 있다 등 뒤에서 여름이 여름을 덮고 있다
손잡고 돌아가는 사람들 풀이 자란 쪽으로 길이 생길 것 같다
손가락이 없는데 움켜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설 때마다 푸른 지팡이가 자라났다
-시집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제4회 선경문학상 수상시집)
하기정 시인 / 밤과 귀 낮의 입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롭고 이상한 감각!
우리는 전생이라는 말 대신 썩 괜찮은 이별이라고 불렀어야 했다
거기 모조리 두고 온 것들 온통 귀로 물든 밤을 낮의 입술이 다 지워서는 지샌 밤의 눈이 다 떠서는 감을 때까지
잘 자, 라는 말 대신 썩 괜찮은 악몽이라도 꾸었어야 했다 팔을 뻗으면 닿을 엄두만 내다가 낮의 입술이 밤의 귀를 다 열어서는 읽을 때까지
우린 왜 자꾸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에만 깊은 우물을 파는지
물속에 두고 온 것들이 가뭄에 모조리 뼈대를 드러낼 때까지 입술을 끔뻑끔뻑 달싹이는 붕어처럼
-시집 『밤과 귀 낮의 입술』에서
하기정 시인 / 가로등
체념이라는 말에 우레가 들어앉아 있다 밤의 귀를 막으면 달팽이가 귓바퀴를 갈고 지나가는 소란들
고백이라는 말에 오늘 저녁 먹다 흘린 그릇들이 포개져 있다 목줄을 끌고 주민보다 먼저 집에 도착한 개처럼 끝내기 위해 시작하는 연인들의 단단한 새끼손가락처럼
발밑의 불빛은 세로로 서 있는 사람들이 납작해질 때까지 그림자를 물고 늘어진다 가로수와 가로등이 조응하는 것에 대해 발밑의 시선에 대해 너도 그렇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고
매일 저녁 길을 지우며 길 안에 길을 도사리고 있는 돌멩이 용수철처럼 경쾌한 탄력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떨어지는 유성우를 함께 목격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사랑하기에 충분했다
불빛들이 뒷목을 상상하는 일에 대해 검은 눈들이 쏟아져 내려 발밑에 길들이 명백하게 지워졌다
그림자의 체념에 대해 간격을 재면서 어쩔 수 없이 쏟아진 길의 목덜미를 힘껏 껴안으며 적당한 거리에 서서 지치도록 서로를 비추고 있다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에서
하기정 시인 /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그늘을 깊게 파는 사람을 알고 있다 거푸집에 누워 왼손바닥을 찍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는 도끼로 계단을 내고 나무에 오르는 일을 경멸했다 기름을 바르고 처참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일에 열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늘 미안해서 안녕이 없는 사람 그리하여 그는 돈을 받지 않고도 아름답고 처절하게 잘도 팔았다 무엇을?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덤으로 얹어주었다 그는 매일 밤 요령부득으로 짠 스웨터를 입고 터진 옆구리를 꿰맸다
요령이 방울 소리를 내며 실패꾸러미를 안고 왔다 꽃병을 응시하다 정물의 배경이 되는 조연들은 필사적으로 필사하는 일이 파국으로 치닫도록 코너로 몰고 가는 중이었다
여전히 지하에서 촉수를 기르는 사람 아직도 제 눈을 찌르고 있는 사람
화살이 일제히 머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
하기정 시인 / 들어가네
팥배나무 잎사귀 그늘 뒤로 무당벌레의 작고 둥근 등 여름의 볼륨과 환대 속으로
걷기 시작한 돌배기의 무른 발뒤꿈치 속으로 무명실로 꿰맨 겨울의 광목 이불 속으로
우리가 함께 들춰 보았던 슬픔의 연대기 속으로 밤의 검은 손바닥에 묻어오는 것들 달팽이의 맨살 속으로 저녁이 한 뼘 걸어오네
시계공이 어쩌지 못한 분침과 초침 생활이 벗어 놓은 겹바지 속으로 후숙한 과일의 단내 속으로
당신이 펼쳐 놓은 쨍한 겨울 얼음과 울음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 시집 「고양이와 걷자』(걷는사람, 2023)
하기정 시인 / 고양이와 걷자
감각의 조율사가 되어 보기로 하자 밤의 고양이처럼 지붕 위를 사뿐히 걸으며 한 발을 들면 다음 발을 내려놓을 것 고양이와 걷자
달빛의 하얀 가루가 먼지의 빛처럼 쌓이네 모처럼,이라는 말을 앞에 잠시 가져다 놓을게 정해진 용도 없이 양말을 손에 신고 발밑에 검은 별들의 배경을 밟고 우리는 모처럼 고양이와 걷자
영역을 벗어나면 동그랗게 눈을 뜨고 한쪽 다리를 들어 모험처럼, 오줌을 누자 불을 피우고 연기를 뿜으며 조난자처럼 밤의 고양이처럼 수염을 뾰족하게 세우고
고양이와 걷자 느슨해진 밤의 건반을 딛자 딛자 딛자
-시집 「고양이와 걷자』(걷는사람, 2023)
하기정 시인 / 바순
그는 슬픔에 관한 한 긴 목을 지녔다 바람의 구멍을 열면 두 개의 목이 서로의 목구멍에 대고 울음을 불어 넣었다 달빛을 가르는 여름 나무의 녹청색 그림자들 놋쇠 바닥에 달라붙은 저녁의 검은 그을음
울음통의 깊은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눈물과 같은 비소와 눈웃음을 그은 선과 같이
침묵이 그를 긴 관에 눕혔다 관통하는 게 울음인지 노래인지 한통속으로 통했다
빛나는 관록과도 같이 청춘의 목울대에 빨대를 꽂고 숨을 불어 넣자
길고 긴 울음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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