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진희 시인(시조) / 구석의 힘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30. 16:45

김진희 시인(시조) / 구석의 힘

 

 

제집을 벗어놓고 달아나던 매미도

가을을 벗기려고 안간힘 쓰던 귀뚜리도

구석진 그늘에 안겨

목청 높이 우는 소리

 

울다 지친 고요와 어둠을 깔고 앉아

어깨 너머 시린 바람 새봄을 불러와서

날밤을 지샜구나

노란 꽃을

피우려고

 

 -《시조미학》 2023. 여름호

 

 


 

 

김진희 시인(시조) / 화성에서 빛을 쏘다

 

 

발자국 가두었던 빗장 풀고 들어선다

조이고 매듭지은 장인들의 고뇌와 혼

팔색길 성곽 따라서 그 울림 엿듣는다

 

망루에 성벽 위에 나부끼는 손, 손들

쌓으면 무너지고 또 쌓은 시간의 켜

허물 듯 쏟아지는 햇살 화성에서 되쏜다

 

-수원화성 테마 시집 《물고을 꽃성》 2023.

 

 


 

 

김진희 시인(시조) / 문상

 

 

우사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소처럼

한밤중 파도에 쏠린 핼러윈의 골목길

국화꽃 터널 안에서

털썩, 미친 밤이다

 

허옇게 거품 물고 벽을 치는 밤이다

엎드려 통곡하는 비 비가 땅을 친다

파르르 입술을 떠는

꽃숭어리 하는 길

 

-《시조21》 2023. 겨울호

 

 


 

 

김진희 시인(시조) / 낙타는 달리고 싶다

 

 

날 키운 명자언니 틈만 나면 도망갔다

반세기 전, 내가 울던 골목길을 따라서

사막의 망망대해로

손닿지 않는 데로

 

모래바람 휘돌아 낙타가 돌아왔다

부은 발닳은 뒷굽 네 몸에 날 얹는다

천만근 뼈 같은 모래가

등을 흠뻑 적셨다

 

마음이 문득 접혀 먼 길 가는 사람아

세상 끝에 서서 단말마를 토하며

외뿔로 떠받힌 상처 딛고

홀연히 떠날 일이다

 

-《시조21》 2023. 겨울호

 

 


 

 

김진희 시인(시조) / 물망초

-김복득 할머니

 

 

나는 꽃,

꽃입니다

바람에 지쳐 쓰러져도

 

별빛 같은 약속 걸고

시집가는 꿈에 젖어

 

하늘빛 물드는 이마

햇살 끌어당깁니다

 

밤 비늘 끌어안고

시퍼런 경기 모아

 

등성이 포로 되어

엎드린 시간의 뼈

 

나는 꽃,

소리치는 말

강물에 울려 퍼집니다

 

 


 

 

김진희 시인(시조) / 꼬리

 

 

이력서는 행간마다 꼬리를 요구한다

상처를 뛰어넘고 한 줄 덧댄 꼬리표

혓바닥 길게 늘이며 해를 따라 달린다

 

몸속에 똬리 틀고 순간마다 펄떡인다

삼켜버린 말에서 웃음 치는 눈에서

고리가 끌고 온 길에

삶의 계략 숨어 있다

 

 


 

김진희 시인(시조)

1957년 경남 진해 출생. 마산교육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창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9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문학> 2회 천료. 시조집 <내마음의 낙관> <바람의 부족部族>. 시선집 <슬픔의 안쪽>. 동시조집 <선물>.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밀양 예림초등학교 교장, 현재 경남문협 사무차장과 경남여류문학회 부회장. 현)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