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보슬 시인 / 랜드마크 외 9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30. 16:51

최보슬 시인 / 랜드마크

 

 

눈동자를 닮은 대륙이 있어

그곳은 약속의 땅

 

약속에 늦은 꿈속은 피가 빠진색

 

다친 잠이 꿈속에 수를 놓는다

 

왼쪽으로 누우면 오른쪽 꿈을 꾸는 것 같아

 

소녀에게는 소녀만의 행렬이 있고

소녀만의 벽장이 있고 소녀는 바쁜 와중에도

발이 없는 천사를 가지고 있다

 

눈과 눈물은 대화를 나눠 가지고

소녀는 얼굴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된다

잠이란 뼈 속을 짐작해 보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구겨진 영토 속에 잠들어 있는 소녀의 혀

 

 


 

 

최보슬 시인 / 소돔과 고모라

 

 

아무 일도 없다

시청 앞 광장

 

지나는 사람의 눈동자는 토성 같았고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점점 더 제 모습을 가리는 도시

 

나는 밤에 있었을까

 

누가 내 생각에 대해 참견할 수 있을까

 

생각에도 피가 돈다

 

나는 몸을 숙여 시청 앞 광장에서만 할 수 있는 생각을 했다

겨울

 

그러나 나는 천천히 혹은

빠르게 작아지는 무엇이자 무엇이었고

 

한 무리의 새들이 공중에서 쓰러지는 일

 

한쪽에선 장미가 이웃처럼 피어 있었고

모든 온갖 이해와 상징 속에서

대체로는 그랬고

결국에는 몰랐다

 

나는 겨울을 응시했다

겨울이 나를 겨누는지도 모르고

겨울

겨울

 

누가 여기 있었을까

구름의 밤이 한때에 실려서 간다

네가 가는 곳이 네가 오는 곳이야

 

눈을 감아도

도시의 문은 닫히지 않고

겨울

 

긴 잠수를 해도

죽지 않아야 할 시간과

물속에서 젖은 땀을 만져보는 일

 

어둠의 흔들림을 보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생각할게요

아침과 겨울과 흔들리는

소금에 대해

 

밤은 정말 밤에 있었을까?

 

도로변, 삐걱거리는 상점의 문들이 쓰러진다

버려질 차도 쪽으로 빛이 묻었다

나불거리는 불빛일수록

 

자신의 안쪽을 흘리고 갔다

 

밤의 몸통이 그늘에 누워 있다

한꺼번에 기다리는 한때의 의자들

 

온갖 창문과

온갖의 겨울이

나아간다

바닥의 잘못 박힌 작은 못이 한 사람의 발들을 기다립니다

 

소돔과 고모라

 

뒤돌아보지 않기로 한다

시든 불빛에 밤의 무늬가 흐트러졌다

사라진다

다섯 개의 빛이 더 놓여 있다

 

저녁이 난민처럼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있다

 

한 사람에게 너무 오래 박힌 그림자가

겨울 빙판에 미끄러진다

 

의자는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다.

 

 


 

 

최보슬 시인 / 시선

 

 

도마 위에 올려놓은

물고기 시선을 본다

 

토막 난 눈빛이

세계를 넘나드는

 

바닥에 온몸을 던져 버리는

막다른 자세

 

물고기는 꿈을 꾼다

 

꿈이 모자라

잠을 늘려야 했던

 

물고기 그림자는

물고기 그림자로 잠이 들었다

 

어떤 물은 아빠를 죽였고

어떤 시선은 구멍을 팠고

 

물은 예감했다

 

팔과 다리가 잘리는 물고기 위로

던져지는 검은 시선을

 

점칠 수 없는 것들이 이룬

물속에서

 

아빠의 등뼈가 소리를 냈다

 

세계에서 세계가 깨지는 소리

 

예감한다는 건 언제나 장면이 필요했지만

 

물고기는 도마의 이력을 모르고 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도록 만든 눈을

읊조려 갈 때

 

물고기는 물고기로써 자신을 버리고 있다

 

저항을 저항 함으로써 저항을 버려야하는 세계의

 

난도질

 

툭툭 떨어지는 피와 빗방울

 

그 아래에서

 

방금 전을 잡으려는 사람

 

눈은 멀리 가고 있다

멀리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의 빛이 차오르는 방안에서 물고기를 잘랐다

 

기억을 보존하는 눈들이 흘러간다

 

이제 갈 시간이야.

 

-계간 『시사사』 2024년 여름호 발표

 

 


 

 

최보슬 시인 / 신은 우산 속에 있지 않는다

 

 

신은 우산 속에 있지 않는다

기도 중이라고 했다

꽉 다문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움켜쥐지만

으깨지면서 으깨지지 않는다

세상은,

목사가 믿음을 연출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뻔한 기도를 자주 잃었다

온도를 찾아다니는 진한 표정들

비가 내리면

우리는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기도를 했다

언제든지 처음 만난 숫자가 됐다

신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우리는 돌고

또 돌아

지구 곁에 앉고 싶지만

도저히 지구는 멈추지를 않는 것이다

꿈속의 기도와 기도의 발목이 젖고 있는 꿈

어느 날엔가

우리가 겹쳐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는 실수의 맞춤법일까

믿음이

불시착할수록

기도의 내력이 선명해졌다

턱을 괴고 어둠을 보는 그는

영영 입 맞추는 법을 잃어 버렸고

흘리고 싶지 않은 기도들을 흘려가면서

두 눈을 깜빡이지만

세상은 으깨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비가 오지 않는데도 펼쳐진 우산이 있고

기도를 하듯 우산을 썼지만

신은 우산 속에 있지 않는 것이다

가장 먼저였던 마음을 찾아다닌다

무엇이든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

교회를 나와 온몸을 굽혀 운동화를 신을 때

모든 사물이 기울고

기우는 건 모두에게 정수리를 보여주는 일

이제는 꿈속 흑백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이

내가 낳지 않은 나라는 아이

신은 텔레비전 속에도 계시지 않고

지구는 날씨를 통해 설명을 하지

우리는 울면서도 사랑을 하고

눈물이 흐르면 우산을 썼다

서 있는 곳에서부터 헤아릴 수 있는 곳까지만 기도를 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세수를 하고

가만히 있기엔 우리는 너무나 살아 있어서

창밖을 본다

신과 나는 아무 관계가 아니다

이제는 우산을 접고

신은 조금씩 자라나고

나는 많이 가지고 논 종이 인형처럼

찢어져 갈까?

우리가 우리를 겹친 세상은

실수의 맞춤법일까?

기도의 길이가 사람을 변화시켰다

나는 신 옆에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분명한 건데

신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웹진 『님』 2023년 10월호 발표

 

 


 

 

최보슬 시인 / 오후 4시의 콜라주

 

 

사라지고 있다

 

혓바닥처럼 입속에서 흔들리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먹다 남은 입술은

더 이상

식탁에 있지 않다

 

맨몸으로 적막에 앉으면

점점 더 사람이 된 듯한 기분

 

우리는 너무 많이 꺼내졌고

모든 방향이 부르는 노래들의 끝

 

이들과 헤어질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몸 밖이 될까?

 

점점 더 선명해지는 하얀 새들의 힘줄들을 보았다

 

몸을 떠난 몸들이

4시의 몸들이 이름으로 부풀 때

 

몸으로 겹쳐지는 허물들

 

유리에 붙은 어제의 하루살이 떼가

유리의 표정이 되는 동안

 

표정은 망친 그림을 들고 어제로부터

덧칠되었다

 

얼굴로 얼굴을 붙이며

몸밖의 여백들로 자라나며

 

입술은 멀리 가고 있어요

눈을 뜰 수 없는 꿈을 꾸었는데

 

어제는 아직도 살아 있나요?

 

우리는 언제나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문을 닫았다

 

하얀 새들이 그림자 위를 부리로 쪼며

몸밖으로 떨어진다

 

죽음을 농담처럼 던지는 사람들

무럭무럭 자라는 밤의 반복들

 

고백을 하면

호주머니 속 손이 자랐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아니었다고 믿는 마음으로

 

점점 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으로

세계에 앉지만

 

반드시 눈을 감아야만

이곳에서 나갈 수 있었다

 

-계간 『시산맥』 2024년 여름호 발표

 

 


 

 

최보슬 시인 / 얼음이 녹아가는 유리컵을 생각하다가

 

 

얼음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미끄럽고 축축하고 단단한 세계를

믿어도 될까?

 

얼음들을 흔들자

비장하게 재현되는 풍경 속 풍경

 

평면의 굴곡들이 무너지고 있다

 

세계를 한 사람의 겨울로 바라보는 일

 

우리는 서로 표정을 바꿔 웃고

깔깔깔깔 그것을 다시

그림자에 숨기고

 

눌러 쓴 모자의 색은 사라져가지

 

그러니까 모자를

눌러 써

 

아니

 

머리에 코를 박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던 걸까?

 

다시 한 낮의 태양

 

얼음의 허리에서 컵의 손이 녹아내린다

 

원래의 자리에서 미리 생각하던 것과

한때는

살고 싶고

죽어가는

 

자리를 바꾸고 싶어

녹을 수 있는 나와 녹힐 수 없는 너와의

 

보폭

 

그림자를 줄이는 내 몸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시 웃음을 줄이고

모자가 작아진 머리를 줄이고

 

다시 만난 표정들에 코를 박는다

 

셋 둘 하나, 숫자를 버리며

믿음처럼

 

얼음이 녹아가는 유리컵을 생각하다가

달과 나 사이의 보폭을 생각하다가

 

물을 틀었다

물에 젖은 신발 속 발처럼

부풀어 오르는

 

녹지 않고 식어가는

빛의 허리를 팔목에 묻힐 때

 

이 모든 일이 다 누군가의 계획이라면?

지금이란 건

얼마나 다행인 걸까

 

조금 더 빨리 닳아가는 빙하와

 

구름을 앞질러 가는 새들을 본다

나는 밀리고 있다

 

입을 모아 둥그런 소리를 내어 보았다

무엇으로도 나를 증명할 수 없고

 

빛의 균열 사이로

조금씩 조금씩 얼음이

녹고 있다

 

나는 조금씩 증발하고 있다.

 

-계간 『문학과 의식』 2024년 여름호 발표

 

 


 

 

최보슬 시인 / stop it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

모든 의미를 외곽에 두는 말 같다

 

함께 있던 자리에서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작정했던 일들이 멈추고

 

움직이지 않는 창문 앞의

거센 풍경들

 

지날 거야

시간은,

 

옛날 일과 더 옛날 일과 지금은 그냥

 

그 밖의 일들

 

아니, 그의 밖의 일

 

진짜를 의심하는 날이 멈추면

믿는 시간으로 너의 테두리가 그려져 갔다

 

입꼬리를 들어 올리면 얼굴로 기근을 일으키는 웃음의 속내

 

부여한 힘들을 쏟고 난 얼굴과

조금만 잡아 당겨도 조여지는 세계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자

아니

가만 있어 봐, 라고 내뱉는 얼굴은

 

그만 둘까? 라는 말을 아침에 두고

 

어쩌면

 

너를 생각해서 한 말이야, 라는 말이

이제까지 끌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엎지르지 말아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움직이는 걸

들키지 않을

 

길고 무수한 것

 

정지된 말에서만 마주한 고통과

갑자기 멈춰서는 아이들

 

움직일 수 없는 말들은

당신에게 의미가 될까?

 

당신은 의미 있는 말들로만

이뤄졌을까?

 

가만 있어 보자.....

 

주문처럼 내뱉던 엄마

 

말할 수 없어서

무언가에 복종한 뒤집힌 숭고

 

가만히 있는 말은

발바닥에 이해가 핀다

 

발과 발의 밖에서

이념들이 자란다

 

모든 의미를 시선에 두고

 

겨우 말 하나를 바깥에 두고

 

가만, 가만, 가만히

 

호흡이 호흡을

순간이 순간을

 

마침내

움직이는

 

침묵.

 

-계간 <시산맥> 2023년 여름호 발표

 

 


 

 

최보슬 시인 / 아무도 모르는 이름

 

 

나무에 새가 걸려 있다

날아간다

 

새를 떼어낸 공중의 과정을

생각한다

 

과정은 말이 많다

 

너는 나를 통해 말할 수 있고

내가 없이도 말할 수 있다

 

깨물린 입술이라도 입술이라 불릴 수 있고

새의 입은 계속해서 가난하구나

 

그늘에 깨물린 햇빛들도 아픔을 알까?

 

볼이 통통했던 어제의 빛

걸어 놓은 새장이 빛과 어둠을 순례한다

 

한 사람의 고백이 저녁을 누르고

어제를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

도망칠 새의 발목을 자르고

 

새의 표정 일부를 으깨어 자신의

관상을 만들었다

 

아직 남아 도는 그의 얼굴로

낯선 표정들이

 

들어간다

 

밤에는

어디선가 잘려온 새의 발에

가지런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언젠가 봄을 깨물로 나오던 여름

 

너는 내가 없어서 말할 수 없고

내가 있어서 말할 수 있다

 

식탁엔 새가 없다

창문은 창문의 온기이고

매일매일은 아직 익명에 있다

 

새가 날고

공중이 깎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새의 이름.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월호 발표

 

 


 

 

최보슬 시인 / 자장가

 

 

나의 꿈은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잠을 걷는 눈이 있다

 

보는 곳마다 입구가 새겨지고

딛는 곳마다 더러워지는 출구의 방식

 

사실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야

여기저기 마음대로 저질러지는 세계

 

얼굴을 오므려 행복한 표정을 묶었다

 

노란 봉고차가 지나갔고

누군가 행복 다음의 일을 점쳤다

 

잠 속의 나였던 난 누구였을까?

 

체리에게는 체리의 잠이 있고

안 보이는 쪽으로도 눈이 내렸다

 

들어봤니?

 

잠 속의 너는

너의 테두리이고

잠들어 있을 때에야 뱃속의 얼굴을 가진다는 말

 

가장 즐거운 잠에서 우리가 죽던 기억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동공을 쥐면

 

상상일 거야 아니 상상만큼 이상할 거야

 

너의 얼굴이 많아질 거고

너의 자막이 시작될 거야

 

꿈속을 다녀가는 짙은 표정들

빗금을 그어도 잘리지 않는 햇빛과

여기저기 꿰매어진 가짜 얼굴들

 

나는 너의 꿈속을 만질 수 없다

전신주를 바라보며 나를 던졌다

 

너는 너의 끝을 만져본 적이 있니?

 

너는 그냥 꿈을 꾼 거야

지나간 꿈과 지나갈 꿈

 

너의 잠 속은 나에게 없고

너의 그림자는 나에게 없고

 

나는 볼 수 없는 한쪽으로 돌아누웠다

 

 


 

 

최보슬 시인 / 존재의 여러 가지 거짓말들*

 

 

자두가 있다

이 말랑한 부드러움을 믿어도 될까

 

예쁜 과일들은 예쁜 거짓말 같다

 

그러나 목숨만큼 뚜렷한 자두

비명만큼 시뻘건 수박의 내부

 

수박을 베어 물다가 수박을 떨어뜨리는 여자와

딸기와 딸기 사이 망설이는 오후의 손을 보았다

여자의 손은 길었다

 

길어지는 것을 틈으로 끼워 맞추는 사이

거짓말들 사이에선 지층들이 자랐다

 

거짓말은 뛰는 호흡처럼 가파르고

몸속의 서로 다른 낙서들이 점점 부풀 때

 

머리카락처럼 자라다가

머리카락처럼 잘리는 사람과 사람

그리고 과일을 오므리는 입술들까지

 

여자의 설익은 입술들은 알고 있을까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수식어가 있었던 걸까

 

우리는 두 눈을 깜빡인단 사실을 자주 잊는다

 

자두가 있다

긴 손가락이 있다

 

어딨을까

너희들의 어린 시절은

 

숨은 아이가 숨다가 이마를 다쳐도

아픔이 다쳤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이 쌓여가는 지층의 세계는 고요하고

목줄에 더 이상 묶이지 않는 바깥의 개들과

 

하얀 식탁 위에서 깜빡거리는 자두

수박과 나 사이로

거짓말이 빨갛게 익고 있다

 

다 익은 입술을 누가 먹을까

결국 그런 것들이 궁금해지는 동안

일어선 여자는 자신의 형태를 흘리면서 말한다

 

“이곳에 실제로 과일들이 있었습니까?‘

 

*아고타 크리스토프『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최보슬 시인

전남 광주에서 출생. 2023년 《문학뉴스》 & 《시산맥》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