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한준석 시인 / 먼 곳에서 온 이야기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30. 16:57

한준석 시인 / 먼 곳에서 온 이야기

 

 

잘 지내?

 

물어보면 안 될까

 

너도 가끔 운다는 소식을 듣는다

 

우리는 바다에 빠져 놀아 본 적이 없다.

검정 우산이 바람에 날아가 웃었던 날이 생각나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계획에 없던 가게에 들어가 따뜻한 밥을 먹었다

다시, 투명한 우산을 사서 바깥을 걸었다

 

혼자서 간 노래방에

동전을 몇 개 집어넣고 가만히 앉아 있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미 시작한 노래들처럼

목소리에는 부스러기가 많다

세 곡은 부를 수 있었다

 

가사는 쉬웠다 새와 수화기, 비밀에 대한 이야기

일인용 의자에 한 사람이 더 앉을 수 있다.

옆방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미러볼 조명 빛의 색깔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7월이 끝날 무렵에 그랬다

 

나도 가끔 웃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제는 집에서 키우는 개가 하얀 털을 다 밀었어

간지러워서 자꾸 발을 핥는 루이

엄마한테 혼이 나는 모습이 어딘가 사랑스러워

 

자취방에서 좋아했던 시집을 정리한다

너에 대해 썼던 메모가 번져 있는 것을 본다

밑줄을 긋는다

모른 척하면 지나칠 수 있었다

 

나는 잊고 싶은 일은 노트에 꼭 적어

그러면 잃어버릴 수 있으니깐

여름을 적는다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슬프지 말고 잘 지내

 

혼잣말하자 이 시에 적혀 있다

 

길에서 들려오는 가사 같다

 

-『문장웹진』 2021년 8월호

 

 


 

 

한준석 시인 / 그랑쥬떼

 

 

발레를 하는 소년이 온다

발 끝을 세우며 내 발등을 찾으려는 듯

얇은 허리를 천천히 구부린다

새장 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이어지는

소년의 흐릿한 표정

 

죽은 새가 새장 안에서 가만히 쓰러져 있다

새장은 빛을 머금고 천천히 돌아간다

얼굴에서 차가운 벽까지 흐르는 빗금은

한사람씩 모른 척 지나치는 긴 그림자가 된다

너는 발끝으로 부서질 듯 흔들린다

피부같은 하얀 옷을 입고

천천히

성에가 되어가는 소년의 조심스런 걸음

 

숨,

에서 미아가 시작된걸까

겨울 숲에서 잃어버린 왼발들은 흐릿해진다

오른발은 매일 자화상이 된다

우리의 무대 바깥은 한명의 숨으로 이뤄졌어

소년이 몸을 뒤집는다

왼발과 오른발을

바꿔가며

손을 놓친 사람과 손 닿으려는 사람을 떠올린다

새장이 비워진다

 

가볍게 바닥에 발 닿는 소리와

함께

소년은 흐린 안개를 남기고 사라진다

 

간지러웠던

내 발등에서 마른 버드나무가 자란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한준석 시인 / 수채화

 

 

자료 이미지. 아이클릭아트

내 뒷모습을 그려보기 위해

거울이 필요하다

 

긴 거울은

얇은 목덜미에서 꺼내오고

손거울은

잠버릇에서 가져온다

속삭임이 닿는 간격은

모두 슬퍼진다

 

나란히 두면

그 사이에서 나를 나눠 가지는 반복들

겨울, 당신의 그네를 밀어주다

손가락이 얼었다

손가락을

물감에 흐릿하게 녹인다

당신의 뒷모습을 그리다 붓을 떨어뜨린다

수채화는 멍이 들기 쉽다

 

두 개의 거울 사이로 곁눈질이 쌓여간다

그곳에 새를 띄우면 영원히 난다

공중을 그리기 위해서 점 하나를 찍는다

당신은, 웃고 있었나

나는 내가 모르는 어제를 물에 불리는 사람이다

내 뒷모습을 그려보고 싶어

얼굴을 물에 오랫동안 담가놓는다

 

현관문에 젖은 발자국이 와 있다

 

나의 표정에 물감이 샌다

공중을 그리고 있다

따뜻하고 아팠다

 

 


 

 

한준석 시인 / 돌고래 기르기

 

 

미소는 돌고래로 기르기 좋습니다

돌고래의 주파수를 라디오로 들어요

나는 무심하게 시작되어집니다

축축하게 연필심이 밤새 헐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에 좋습니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한준석 시인

1990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화과정 재학. 2021년 《세계일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