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이서 시인 / 꽃그늘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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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이서 시인 / 꽃그늘
동창회에 가면 입들은 행복이 넘친다 돈 자랑, 집 자랑, 차 자랑, 자식 자랑, 남편 자랑 자랑들 식당 안에 뜨겁게 둥둥 떠다닌다 잉꼬부부 자칭하는 누군가 나서 우쭐대며 말한다 끼리끼리 만나 팔자대로 사는 거라고 자랑할 거 없어 구석쯤에 앉아 물만 마시던 나도 없는 자랑거리 만들어 더 큰소리로 합세하자 시끌벅적 자랑들로 둥둥 식당이 떠내려간다
늦은 밤 동창회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세상 하나뿐인 모양과 빛깔로 험한 골짜기 어렵사리 핀 나만의 꽃이 시들시들하더니 이내 꽃잎을 닫는다
그들의 입이 함빡 피어 올린 꽃그늘 아래서
허이서 시인 / 씨앗 봉투 돌리는 여자
생기 있는 이야기 담긴 종이 작게 접어 열린 투명한 봉투 안에 살뜰하게 깔고 먹거리 호기심거리 가득 넣고 밀봉한다 투명한 포장지 안에서 얼굴들이 어른거린다
누군가의 씨앗 가방에 넣고 일을 나선다 자주 가는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자 어디 갈 곳이 있냐며 주인 언니가 묻는다 딱히 정하지는 않았어 만들러 가는 거지
나는 인연을 지으러 다니는 사람이잖아 가방에 담은 씨앗 봉투 꺼내 보이며 웃는다 나는 어디서든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여자 정해진 약속이 없고 시간이 훨훨 남아돌아도
일어서서 어디론가 가야 하는 직업병이 있다 누군가에게 전한 씨앗 봉투가 열리다 보면 그의 손에서는 싹이 트고 꽃이 필 것이다 나는 파릇한 인연을 틔우러 다니는 여자
씨앗 봉투 오밀조밀 만들어 전할 때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얻어 함께 나누고 싶다 붉은 단풍잎을 따서 포장하다가 잠이 들어도 빨간 구두 신고 또각또각 길을 걷는다
허이서 시인 / 눈사람의 뼈
하늘이 하얗게 붐비는 날마다 어지러웠어 수억 개의 질문처럼 눈이 되어 내리면 기억의 뼈대를 세워 너를 뭉쳐보려 했어 나는 사람이 그리워 북적이는 곳으로 가려했고 너는 안으로 들어가 혼자이고 싶어 했지 나는 겨울 파도소리를 보러 가자했고 너는 온통 하얀 에베레스트산을 오르고 싶다 했지 그해 간절기엔 서로 다른 바람의 온도를 읽고 있었던 걸까 너는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지 오늘처럼 폭설이 온몸으로 내리는 날엔 기억의 틈에서 뼈대가 자라나 붐비는 너를 둥글려 뭉쳐 놓곤 했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리움을 짓다 보면 얼굴 아닌 얼굴의 중심을 더듬거리곤 했어 삐뚤어졌을지도 모를 코를 만들고 눈동자를 지으려다가 빈 소리만 아득한 채로 녹아내렸어 앞을 볼 수 없는 나는 온통 너밖에 없는데 내가 만든건 백색 어둠이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니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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