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우 시인 / 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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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우 시인 / 개
생명은 간명하게 삶과 죽음으로 나뉜다
나뉜다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말,
긴 쇠사슬을 따라가보면 어김없이 죽어가는 개가 혀를 물고 있다
혀에서 시작해 꼬리로 이어지는 전율이 생의 좌우를 흔들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날카로운 이빨은 얼마나 쓸모없는 상징이었나
저 길고 축축한 감옥에서 밥이 나오던 시간을 떠올리는 개는 온몸을 부르르 떤다. 축 늘어져가는 몸에 깊게 박혀있는 습성이 밀려나온다
핥고 빨던 시간의 더러운 침이 터진 지갑 같은 턱에서 쏟아진다
온몸의 혈을 고이게 하던 붉은 혀는 한때 개의 중심이었다 중심에는 혀를 내두르던 복종이라는 함의가 아직 빙빙 돌고 있다
멀리 달아나려 할수록 목구멍을 조여오던 날들이 죽음 직전에 몰려와 눈에는살기가 번득인다
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혀를 게워내, 문다
한마리 맹수가 죽는다
-문학매거진 《시마(詩)》 2024년 봄, 18호
박재우 시인 / 구름 다이어리
우리가 처음 만난 사이라면 당신이 묻는 길을 잘 가르쳐줄 텐데
어쩌면 내가 당신이 가려 하는 길을 먼저 가본 사람이거나 그 길 끝의 주민이거나
마을을 불태우고 도망쳐 나온 사람일 수도 있겠다
비가 사선으로 내리는 날의 쓸모없는 우산이거나 뿌리 없는 돌의 돌부리이거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기억의 한 부분을 떼어내 버리면서 생의 하루를 연장해 가는 기술을 당신의 희망이라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런 일은 너무 흔해. 병이야 보조침대에 굽 낮은 말이 고여도 병실 같은 눈길을 닦아주면서 믿게 되지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오늘의 다행인데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 절 아세요? 같은
이런 말은 초행의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 길은 처음이라서 길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우린 함께 오늘이 두려운 악마가 될 수는 있다
그래, 희망은 악마도 가질 테니
나는 침대 깊이 당신의 길을 누르고 잠을 묶는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서 살자 불을 끄고, 더 이상 길을 믿지 않게 된다
다만, 내가 바다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염전에 닿은 햇살처럼 스러져가기를.....
뜻 모를 혹은 뜻 없이 막연해지는 당신 생애와 살림을 차리고 뜨거운 컵라면을 후후 불어준다
우린 익숙한 사이가 아니라면 언제든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계간 열린시학/2024.봄호
박재우 시인 / 명태
저 바다에 섬이 많은 것은 명태가 많기 때문
배 끊기고 나는 끊겨버린 갈 곳이 있어 오늘은 술집에서 늙은 여인보다 더 밝은 빛은 없을 것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하얀 맨살 부딪히며 끓고 있는 명태는 모른다 눈보라 치는 날, 섬은 하나씩 더 생겨난다 베링 해나 오오츠크 해협까지 나가 돌아오지 않는 찬 그리움들이 술집 낡은 문틈으로 창백한 눈송이 몇 던져놓는다
눈이 상복 같은 흰색을 벗고 투명한 한 방울의 물로 바닥에 스미듯 명태를 따라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법
다만 그 곁으로 섬은 섬을 이어가다 늙어버린 사람이나 병든 사람의 울음 끝자락이 어둠의 쇠골을 비추는 동안 무릎뼈 드러내며 천천히 쇠약해 갈 뿐이다
기억의 폐쇄회로처럼 어떤 말로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저 세월, 토막 난 격랑의 밑바닥 뒤적이는 일일 것이니
뜨거운 국물을 오늘의 슬픔 속으로 밀어 넣는 펄 내 나는 술집 벽에 춘화나 겹겹이 걸어놓고 늙어가는 생이여 그 곁으로 끝없이 끝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2월호 발표
박재우 시인 / 유빙 머리맡에는 물수건이 얼고 있었다 늦저녁 자갈밭에서 돌아온 엄마가 돌덩이 같은 손으로 두드리고 꾹 짜낸 물수건이었다 모두가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잠든 날 언덕배기 무덤도 흰 솜이불 덮은 듯 밤새 곤한 잠꼬대가 봉긋했다 봉창문 밖에는 아버지의 붉고 뜨거운 각혈이 눈을 녹이며 점점 보이지 않는 데까지 가닿고 있었다 새소리도 눈발에 주저앉는 곳, 텃밭에 층층이 묻어놓은 무가 흙벽에 실뿌리를 대는 소리, 대야에 받아둔 물이 방구석에서 한 덩어리로 결빙되는 소리 그런 소리들은 대야를 엎질러도 흩어지지 않아 한글을 떼듯 혀로 살살 녹여먹던 밤 엄마는 문틈으로 들어온 냉기에 등골을 바치고 모로 누운 우리는 서로의 등에 업혀 추운 줄 모르고 어둠 깊은 곳으로 떠내려갔다 세상이 추울수록 따뜻해지는 얼음이었다 아작, 이빨로 깨뜨려 먹던 뜨거운 얼음이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박재우 시인 / 흰개미
흰개미가 푸른 나뭇잎 한 장 떠메고 캄캄한 땅속으로 들어가네
흰개미는 밥 한 끼 벌러 하루에 백 미터를 간다는데 솜털처럼 자디잔 다리를 생각하면 그 거리는 백 리일 거야
땅속에는 흰개미의 집이 있겠지 불도 들어오지 않는 재개발 연립주택처럼 바닥에 닿은 발걸음이 웅, 웅 공명을 울려대는 긴 복도를 따라 흰개미는 지금 푸른 잎 한 장 떠메고 가고 있겠지
찰칵, 철거반원이 뿌리고 간 스프레이 붉은 냄새 벌벌 풍겨오는 집 자물쇠를 열면 살갗이 유리처럼 투명한 새끼들이 꿈틀꿈틀 볼록렌즈를 만들며 커다랗게 기어 나올 거야
흰개미는 푸른 나뭇잎 하나의 등을 천정에 걸어놓고 마른 젖무덤을 꺼내 새끼의 울음을 달래며 어둠의 끝에서 끝까지 시계추처럼 왔다가, 갔다가 등에서 버섯 같은 김이 피어오를 때까지 갔다가, 왔다가 할 거야
지하의 밥은 더디게 익고 그 밥 다 먹고 나면 딸깍, 불도 꺼져버리고
주무를 발이 너무 많아서 어둠이 너무 두꺼워서 하얀 상복 같은 몸도 묻히면
까맣게 익은 청상의 유두 같은 아침이 새 어둠을 몰고 와 일어나 어서 일어나 일 나가야지 퉁퉁 부어오른 슬픔을 깨워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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