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여운 시인 / 배롱나무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 19:06

정여운 시인 / 배롱나무

―혜성 대종사

 

 

묵언수행 중이던 배롱나무에 몰아친 칼바람

새벽 법당은 비명과 선혈로 범벅이 되었다

하얗게 질린 달빛이 몸을 떨었다

 

진돗개가 밥그릇을 차며 대웅전을 지키고

목어가 밤새 뜬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총칼에 찍히고 군홧발에 짓밟힌 나무 하나

구금대로 개처럼 끌려갔다

 

개판이다 정치판도 도덕도 법도 양심도

마구니[魔軍]의 시나리오 누명을 쓰고

가사 장삼 다 찢기고 알몸이 되었다

개머리판으로 맞은 몸,

거적때기에 말렸다 탈장이 되고 항문이 터졌다

고문은 질기고 붉었다

 

육신을 잃고 혼몽인 듯 극락인 듯 지옥인 듯

먹물 바지저고리 입고 출가하던 스무 살

그 새벽길이 까무룩 떠올랐다 무너졌다

다시는 승복을 입지 않겠노라

허위진술 강요받고 치탈도첩褫奪度牒 당했다

 

훨훨 날 수 없는 사바의 시간

가진 것도 버릴 것도 없다

사바의 눈보라에 발을 묻고 알몸으로

붉은 자비를 꽃피운 나무 한 그루

 

―『대구경북작가회 대구시협』 2022. 9

 

 


 

 

정여운 시인 / 문에도 멍이 든다

 

 

누가 저 방문에 목숨 한 숟가락 꽂았을까

 

추위는 검은 두루마기 같은 구름 두르고 찾아왔다

안방이 단단히 잠겨 있다

 

나비장석에 걸려 있는 놋쇠 빼다가

왜 목숨 하나가 갇혀 있는지를

네발로 기어 다닐 때 암죽을 먹여주고

두 발로 걸어 다닐 때 도시락 챙겨주고

두레상 펼쳐놓고 함께 밥을 먹던

그 숟가락을 생각한다

 

곰팡이 푸르게 슬은 모진 쇠붙이 하나

겉과 속을 나누는 문 앞에서

늙은 숟가락이 늙은 사람을 붙들고 있다

 

명치 끝 방에 피멍이 드는 밤이다

삭은 문이 흔들리며 몸서리치고 있다

 

휠체어 바퀴 테두리가 반짝인다

뼈만 남은 반달 숟가락에 얼굴이 비친다

 

평생을 한 몸처럼 입속에서 살아온 쇠붙이

아버지의 목숨 한술 뜨고 있다

 

―《서정시학》 2020. 여름호

 

 


 

​정여운(鄭餘芸) 시인

대구에서 출생. 2013년 《한국수필》로 수필, 2020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문에도 멍이 든다』 『녹슨 글라디올러스, 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 교육연구서 『로그아웃, 돌아온 아이들』 등을 출간. 2019년 「붉은 도장」으로 불교신문 10·27법난 문예공모전 산문 부문 대상 수상. 2024년 인천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시와 수필 두 부문에 선정. 2025년 제16회 김우종 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시립대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이며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