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운 시인 / 배롱나무 외 1편
|
정여운 시인 / 배롱나무 ―혜성 대종사
묵언수행 중이던 배롱나무에 몰아친 칼바람 새벽 법당은 비명과 선혈로 범벅이 되었다 하얗게 질린 달빛이 몸을 떨었다
진돗개가 밥그릇을 차며 대웅전을 지키고 목어가 밤새 뜬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총칼에 찍히고 군홧발에 짓밟힌 나무 하나 구금대로 개처럼 끌려갔다
개판이다 정치판도 도덕도 법도 양심도 마구니[魔軍]의 시나리오 누명을 쓰고 가사 장삼 다 찢기고 알몸이 되었다 개머리판으로 맞은 몸, 거적때기에 말렸다 탈장이 되고 항문이 터졌다 고문은 질기고 붉었다
육신을 잃고 혼몽인 듯 극락인 듯 지옥인 듯 먹물 바지저고리 입고 출가하던 스무 살 그 새벽길이 까무룩 떠올랐다 무너졌다 다시는 승복을 입지 않겠노라 허위진술 강요받고 치탈도첩褫奪度牒 당했다
훨훨 날 수 없는 사바의 시간 가진 것도 버릴 것도 없다 사바의 눈보라에 발을 묻고 알몸으로 붉은 자비를 꽃피운 나무 한 그루
―『대구경북작가회 대구시협』 2022. 9
정여운 시인 / 문에도 멍이 든다
누가 저 방문에 목숨 한 숟가락 꽂았을까
추위는 검은 두루마기 같은 구름 두르고 찾아왔다 안방이 단단히 잠겨 있다
나비장석에 걸려 있는 놋쇠 빼다가 왜 목숨 하나가 갇혀 있는지를 네발로 기어 다닐 때 암죽을 먹여주고 두 발로 걸어 다닐 때 도시락 챙겨주고 두레상 펼쳐놓고 함께 밥을 먹던 그 숟가락을 생각한다
곰팡이 푸르게 슬은 모진 쇠붙이 하나 겉과 속을 나누는 문 앞에서 늙은 숟가락이 늙은 사람을 붙들고 있다
명치 끝 방에 피멍이 드는 밤이다 삭은 문이 흔들리며 몸서리치고 있다
휠체어 바퀴 테두리가 반짝인다 뼈만 남은 반달 숟가락에 얼굴이 비친다
평생을 한 몸처럼 입속에서 살아온 쇠붙이 아버지의 목숨 한술 뜨고 있다
―《서정시학》 2020.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