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진희 시인 / 잔설 내리는 새벽길

파스칼바이런 2025. 9. 4. 21:36

김진희 시인 / 잔설 내리는 새벽길

 

 

그는 추적추적 걸음을 뗀다.

묵은 나이 허술해진 몸 탓을 해본다

고달픈 한기가 발끝을 따라 와 함께 걷고

주머니엔 동전 몇 푼 남루해진 인생 담뱃갑으로

구겨져 있다

아직 지켜야 할 것 구겨진 채

체념도 타협도 길들여지지 않는지

시퍼런 바람 살 송곳 된 새벽 겨울이면

삶은 더욱 잔혹하다

마음이 춥다

 

고통도 힘이 된다던 젊을 때 허풍도 소용없어

한번도 슬픔과 친해지지 못했다

마음에 굳은 새벽 응혈 너무 에려

잔설 서걱이는 길 따라 붙박인 입 봉한 가로수들

더욱 외롭고

세상은 결코 빈곤함에 인자하지 않다

성에 낀 유리창에 비친 모호한 표정

수취인 불명 같은 편지로 가야할 곳 아득하고

어디 멀리 유랑하는 시인의 넋 살아오는지

부력 없는 눈발 흩어진다

눈초리에 얼음 파편 꽂힌 전혀 따뜻하지 않은

몇몇 이들 수상쩍게 그를 스쳐 지나가고

아직도 완강한 삶의 무게로 두터워진 주름살

도시에 또 한해의 겨울 새기는데

짧은 옷깃 막막한 희망으로 추켜올리면

푸슬푸슬 잔설로 재 뒤집어 쓴 길목 따라

그는 오늘도 새벽을 걷는다

 

 


 

김진희 시인(교수)

1956년 광주 출생. 이화여대. 미 트루대에서 박사학위(철학박사), 교수, 詩 <진달래 연작>으로 <여성신문사 주최><제3회  여성문학상>수상 등단. 시사랑사람들 동인. 시집 『가슴의 불길 감출 수 없는 때』 外 다수의 평론집 및 저작.작품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