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륜 시인 / 엑셀의 정석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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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륜 시인 / 엑셀의 정석 오래전 신입명찰을 달고 소프트, 라고 처음 발음했을 때 입안의 혀가 찰과상을 입었다 그것은 내 여자가 가슴에 품고 있는 것과 달라서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마이크로, 는 결국 나를 휴지통으로 후- 밀어냈다 강마루 깔린 거실은 또 하나의 시트 아직 모른다 당신은, 그곳이 얼마나 틀어진 함수 속의 좌표인지를 나는 오늘도 빈 테이블 위에서 조금씩 삭제되는 법을 익힌다 왜 함구했을까, 평생 멍석 위에서 물음표처럼 굽은 등의 아버지는 정석은 멍석보다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친구 명석을 떠나보냈다 그와 나누었던 그리움 몇 장은 파쇄했고 나의 오후는 아직 미납 중이다 찬바람이 불었다 이곳 노숙자 쉼터에는 짝짝이 신발들이 입을 벌렸고 꽁초를 줍던 광장의 태양은 자주 쿨럭였다 파산과 절망에는 어떤 서식도 필요 없었지만 달력이 얇아질수록 저마다 명치로 삭여야 할 파이가 늘어갔다 그리고 내 안엔 X이자 Y이기도 한 여자가 저장되어 있다 먼지가 된 내가 거실에 몸을 말고 무수한 네모를 독백처럼 채워가는 동안 여자는 몇 번의 상승과 추락을 거치며 건망증과 우울증 사이를 그래프처럼 오르내렸고 어느 겨울밤 둘은 서로의 폐경을 가운데 놓고 노래를 불렀다 불을 끄자, 다른 이름이 되어 들어오는 달빛 그녀 안쪽 물컹한 버튼을 누르자 여자의 눈 속에서 밤.새. 따뜻한 내가 인쇄되어 나왔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4월호 발표
김사륜 시인 / 아버지의 삼베옷
올여름도 거미는 찾아와 부지런히 일을 하는데 아버지의 삼베옷 사이 쉰 막걸리 같은 땀 냄새 못 맡은 지 이십구 년째
김사륜 시인 / 십일월의 삽화
사내가 고구마 속에서 푸른 선로를 뜯어낸다
덜컹, 늙은 선로 깊숙이 침범한 바람과 햇살이 바퀴에서 풀려난 둥근 속도에 잘려나간다 제 상념 속 로프에 걸려 비틀거리는 사내 소실점을 끌어오던 직선의 시간들이 코일처럼 감겨 둥글어진다
허수아비도 짐을 싼, 기찻길 옆 묵정밭 철거가 진행 중인 선로와 침목이 사내의 하루를 해체하고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늘을 방석처럼 깔고 앉은 아낙이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독백을 해대는, 간이역 철둑 깊숙이 녹슨 들판이 박혀있는 가난한 땅에 사내의 새파란 정수리 위로 서리 맞은 노을이 낮게 내려온다
살점이 다치지 않게 고구마를 캐는 사내 덩굴을 찾아 기우뚱 넘어가는 비탈길,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서울행 기차 저 멀리 열차객실에서 한 아이가 고구마 칩을 먹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늦가을, 전화기 속으로 황급히 달려든 인사계 장부에 붉은 불이 켜지고 석양을 끌며 멀어지는 기차 꽁무니를 재빨리 지워버리는 터널 저 열차처럼 내일쯤은 사무실 책상에서도 누군가가 삭제될 것이고 십일월 들판은 그의 충혈 된 눈처럼 한 뼘은 더 붉을 것이다
김사륜 시인 / 주걱을 읽어주시겠습니까
손가락으로 구두를 신다가 손톱 끝이 부러진 후 구둣주걱을 지니고 다닌다
주걱이라는 두 글자를 발음하면 모든 곳에 당신이 서 있다 젓는다, 부엌에서 묵이 눋지 않도록 한쪽 방향으로 솥 바닥을 긁던 시간들 일어난다 일제히 도토리묵이 용암처럼 끓고 누운 채 나를 쳐다보는 수천 개의 동공 바닥을 긁던 주걱과 언제나 둥글게 말이 없는 당신
가마솥 안 낭떠러지를 가득 안고 뜨거운 오솔길을 읽어주던 주름진 당신 눈을 감고 주걱을 만져보면, 점자처럼 집히는 숲 새소리와 다람쥐 소리가 톡톡 잎사귀처럼 돋아 있는 나무의 손, 바람을 닮은 주걱이 가마솥에서 고분고분 노래를 섞는다
숲에 들 듯, 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온몸이 납작해지도록 솔숲을 열어주고 눌어붙은 새들의 울음을 떼어주던 주걱이 지천으로 울창한 숲을 만드는 계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구두의 뒤꿈치에 푸른 손을 갖다 대는 새벽 악어처럼 꽉 깨문 구두 속에 방금 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열매 하나 발뒤꿈치 속으로 환히 불을 켜는,
여전히 당신의 방향으로 걸으면 아침 해가 뜬다 -계간 『문학과 의식』 2024년 131호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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