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시인 / 곡절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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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 / 곡절
정강이뼈로 피리를 다듬었다는 옛이야기가 생각나서 오래전에 덮어버린 기록을 들춰본다 심지가 꺾였을 때 안절부절못하는 촛불처럼 악공은 노래의 불씨를 마침내 되살렸을까?
연주를 내려놓고 정강이뼈를 다시 끼워 보폭을 맞춘다지만 어디 온전한 복원이 있으려고, 걸을 때마다 무릎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절름거리는 골 피리의 음률을 너는 아느냐? 그는 지금 곡조의 강을 건너고 있다
평생을 용서받으려고 그는 어둠을 먹지 삼아 골필로 눌러쓴다 한 곡조가 끝나도 피리 소리는 자책으로 짠 감옥 속을 헤맨다
이것은 혼자서 연주하는 곡절에 관한 이야기 그림자로만 살다 가는 어떤 곡절 김명인 관한, 짧고도 긴 이야기
김명인 시인 / 물의 윤회
물소리가 골짜기를 쪼갠다. 음계를 바꿔가며 계곡을 빠져나가지만 허기를 채우고 마침내 다다르는 바다라면 물은 윤회하는 것일까, 분수라면, 폭포라면, 강이라면?
일행은 뜬다 만 오리발을 빈 깡통에 물리면서 늦더위 속 하오를 함께 바라본다 우리는 뒷물이니 형상은 짓지 말고 천변만화인 물소리나 따라가자고
누군가 자꾸만 오리탕 속에서 말복을 건져내는데 평상 아래로 쉬지 않고 물갈퀴가 배달된다 흩어졌다. 강이 되고 바다에서 만난다고 이 물이 저 물일까?
가령 느닷없이 우박으로 형해를 바꾸더라도 물이 갇혔다 하겠는가, 담거나 비우거나
물은 물이어서 구름에 들더라도 천지 자욱하게 한 소나기 흩뿌리고 남은 구름만 멀건 국물 속을 더듬는다. 거기 빠진 일행이 제 몰골에조차 무심해도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에서
김명인 시인 / 돈
한때 나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 못 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며 지샌 적이 있다 비웃지 마라, 그땐 그게 절박했었다 그렇다 두 분 형님께서 포기한 대학을 내가 끝까지 마쳤던 것은 돈에 대한 맹목의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내 대학이 선탄부로 가정교사로 끝이 났을 때
배운 것이야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돈 버는 길이란 사기거나 투기라고 일깨워준 저 7,80년대의 경제를 거쳐 내가 집칸이나 장만한 것은 그 길에 밝아서가 아니라 아내의 맞벌이 덕이었다
그러나 돈이 돈을 거둬들인다고 뒤늦게 한탄한 아내여 남편은 백면의 여전히 주변머리 없는 서생이었을 뿐 무슨 주제로 헐거운 돈을 만났겠는가 그대의 눈썰미가 마련한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난 뒤로 자주 목이 말랐고 자꾸만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 번도 널 풍족히 누릴 수 없었다 해도 돈이여, 어느새 너는 내 발목을 잡고 있지만 나는 네게서 다시 철저히 배반당하는 꿈을 요즈음도 꾼다 너를 돈이라 말하면 네가 돈이겠느냐 그게 인생의 목표쯤은 아니라고 해도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 문학과지성사, 1988년
김명인 시인 / 겨울의 빛
골목 안 국밥집에는 두 사내가 마주앉아 허름한 저녁을 들고 있다, 뚝배기 속으로 달그락거리던 숟갈질이 빈 반찬그릇에서 멎자 한 사내는 아쉬운 듯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붙여 물고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마주앉은 사내는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은 닦아 낼 겨를도 없이 남은 국물을 들이마시고 마지막 깍두기를 씹고 있다, 언제 왔는지 어둠이 깊은 심연처럼 그릇 바닥에 고여 어둑히 내다보면 구겨지는 골목으로 벗어나며 저 사내에게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일까 어느새 웃자란 수염이 차지한 뽀쪽턱을 비껴 추위에 움츠린 겨울의 가등(街燈)들이 무심한 듯 길바닥에 일렁거리지만 불빛이 감추는 망막 때문에 유리창 안쪽으로 따뜻한 것들이 기웃거리는지 아까부터 군청색 작업복의 사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대책 없는 허술한 앞날일 뿐 잿빛 잠바도 모르는 사내들의 길 위로 어디서나 흔해빠진 길들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오고 간다
김명인 시인 / 실족
그 작은 연못에서 그가 실족했으리라곤 누구도 믿지 않았다. 사체는 부패한 채 며칠 만에 떠올랐다 등에 거적대기를 대고 누워 노인은 이제 아무것도 버틸 것이 없다는 듯 검게 팬 눈으로 구름의 흰자위를 뿌옇게 걷어올리고 있다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듯 거칠게 접힌 얼굴이며 목덜미의 주름, 조야한 음식이 간단없이 드나들었을 반쯤 벌린 저 입, 몇 만 톤위 공기를 오염시켰을 그의 숨쉬기가 멈춘 코에서는 뜨물 같은 체액이 흘러 입가 까칠한 수염을 적셔놓았다 마지막 외로움이 비어져나오는지 컴컴한 목구멍으로부터 헛것인 한숨이 희미하게 흩어진다 왜 그런지 스산하게 주먹을 쥐고 있지만 기운이 다 빠져나가버린 손, 어딘가 살고 있을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고 또 누군가 죽음은 연고가 필요없다고 다 끝난 것이라고 평소보다 배나 깨끗하게 닦였을 맨발 위로 그가 헛딛지 않고 걸어갈 하늘 길이 팅팅 불은 채 떠 있다
-시집 <바닷가의 장례>1997년 / 문학과지성사
김명인 시인 / 향나무 일기장
연기군 서면 봉산동 그 향나무를 만나고 나서 틈날 때마다 남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버릇이 생겼다 손짓과 표정 사이에 시간을 섞어 그대에게 들키는 내 침묵의 전언처럼 사백 년도 더 된 향나무 한 그루의 내력이 고해 성사로 읽혀진들 스스로 옮겨 앉지도 못해 멸문滅門이 되어버린 이웃과 폐가에게 이 집의 연보를 새삼 들춰 보일 필요가 있을까 한번은 문짝까지 뜯겨져나간 폐가 마당에서 주운 조치원여고 2학년 1반 이영금, 1979년의 학생증으로도 밤늦도록 불 밝히고 앉아 서른서너 살 내 행적 되짚어보았지만 그때 무성했던 가시조차 메말라버린 지금 어떤 습관이 여기 가지 뻗고 살아온 향나무의 일거수라는 것일까 썩은 밑동을 시멘트로 채워 놓고서도 청와(靑瓦)를 잔뜩 이고 선 저 집채를 바라보면 몸의 노쇠가 정신의 퇴화인 양 무겁게 읽혀지지만 흔적조차 깡그리 지워져버린 떠돌이 집들에게는 저쪽 폐가라도 도대체 몇 대가 벋어나갔거나 이울었거나 다시 쌓으면서 무너뜨렸다는 것일까 집이라면 나도 허술한 반백으로만 가구를 들여서 서툰 수화라도 더듬고 싶어지는 이 침묵의 일기장 몸 전체가 고택으로 여기 쭈그리고 앉은 저 향나무나 그 곁 판자로 입을 봉한 훨씬 젊은 폐가에겐 고백하고 싶은 하루하루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보다 향나무는 금세 썩어버릴 서까래에게 못 이기는 척 제 무거운 가지들을 부축하고 섰다.
-[문학과 사회] 2003년 가을호
김명인 시인 / 주름
나이답지 않게 팽팽한 얼굴을 쳐다보다 눈가장이에 더께 진 잔주름을 발견하지만 다독일수록 엷어지는 것도 아닌데 목덜미까지 파고든 몇 가닥 실금 가리려 애쓰는 건 그것이 조락을 아로새긴다는 확신 때문, 아무리 변죽을 두드리며 달래더라도 주름에게 하루하루란 윤택한 시간이 아니다 쏟아져 내리는 여울처럼 시원하던 복근이 어느 날 이마며 두 볼에도 흉물스럽게 옮겨 앉는다 손금 하나로 골목을 주름잡았다는 그를 볼 때마다 잔골목이 하도 많은 동네라서 길 잃기 십상인 나도 맨발인가, 아기는 쪼글쪼글한 주름 발바닥까지 휘감은 채 태어난다 울음을 터트리며 종주먹질해대는 말년이 아니더라도 주름은 누구의 것이든 삭은 동아줄인 것을, 그걸 잡고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으로 주름져간다 주름투성이의 손바닥을 옴켜쥐고 저 세상의 아기 하나 지금 막 요람에서 돌아눕는다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에서
김명인 시인 / 수심에 길들여지지 않는 장님 물고기
백 킬로그램이 넘는 돗돔이 잡혀 바닷속 물길을 궁금하게 하지만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기진한 어부에겐 뱃전에 눕혀놓은 가오리가 괴물 같다 추가 도달하는 곳 해저라 해도 상상이 도사리는 깊이라면 경악할 뿐, 수심을 몰라 닿지 못하는 바닥엔 무엇이 사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내가 떨어뜨린 한 편이 가라앉아 심란해진 마음 이리저리 뒤적거리지만 우리 심성 어디에 공포를 동반한 심해가 있어 내려갈수록 캄캄하게 좁혀진다면 나는, 옴팍진 해구를 건너뛰는 장님물고기와 다름없으리! 빛을 엿보는 자 내 안에도 있어 흑암이었을 때 그 기미를 끌어안으면 무언가에 갇혀 있다가 활짝 젖혀진 상상들은 그렇게 이어진다, 심해의 비밀처럼! 저 산봉우리에서 조개 무덤이 발견되지만 일생을 함구한 자의 등을 은밀하게 떠미는 절벽 해구 따로 있을까 싶어 지느러미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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