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명인 시인 / 곡절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8. 17:08

김명인 시인 / 곡절

 

 

정강이뼈로 피리를 다듬었다는

옛이야기가 생각나서

오래전에 덮어버린 기록을 들춰본다

심지가 꺾였을 때 안절부절못하는 촛불처럼

악공은 노래의 불씨를 마침내 되살렸을까?

 

연주를 내려놓고

정강이뼈를 다시 끼워 보폭을 맞춘다지만

어디 온전한 복원이 있으려고,

걸을 때마다 무릎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절름거리는 골 피리의 음률을 너는 아느냐?

그는 지금 곡조의 강을 건너고 있다

 

평생을 용서받으려고

그는 어둠을 먹지 삼아 골필로 눌러쓴다

한 곡조가 끝나도

피리 소리는 자책으로 짠 감옥 속을 헤맨다

 

이것은 혼자서 연주하는 곡절에 관한 이야기

그림자로만 살다 가는

어떤 곡절 김명인 관한, 짧고도

긴 이야기

 

 


 

 

김명인 시인 / 물의 윤회

 

 

물소리가 골짜기를 쪼갠다. 음계를 바꿔가며

계곡을 빠져나가지만

허기를 채우고 마침내 다다르는 바다라면

물은 윤회하는 것일까, 분수라면, 폭포라면, 강이라면?

 

일행은 뜬다 만 오리발을 빈 깡통에 물리면서

늦더위 속 하오를 함께 바라본다

우리는 뒷물이니 형상은 짓지 말고

천변만화인 물소리나 따라가자고

 

누군가 자꾸만 오리탕 속에서 말복을 건져내는데

평상 아래로 쉬지 않고 물갈퀴가 배달된다

흩어졌다. 강이 되고 바다에서 만난다고

이 물이 저 물일까?

 

가령 느닷없이 우박으로 형해를 바꾸더라도

물이 갇혔다 하겠는가, 담거나 비우거나

 

물은 물이어서 구름에 들더라도

천지 자욱하게 한 소나기 흩뿌리고

남은 구름만 멀건 국물 속을 더듬는다. 거기 빠진

일행이 제 몰골에조차 무심해도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에서

 

 


 

 

김명인 시인 / 돈

 

 

한때 나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 못 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며 지샌 적이 있다

비웃지 마라, 그땐 그게 절박했었다

그렇다 두 분 형님께서 포기한 대학을

내가 끝까지 마쳤던 것은 돈에 대한

맹목의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내 대학이 선탄부로 가정교사로 끝이 났을 때

 

배운 것이야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돈 버는 길이란 사기거나 투기라고

일깨워준 저 7,80년대의 경제를 거쳐

내가 집칸이나 장만한 것은 그 길에

밝아서가 아니라 아내의 맞벌이 덕이었다

 

그러나 돈이 돈을 거둬들인다고 뒤늦게 한탄한 아내여

남편은 백면의

여전히 주변머리 없는 서생이었을 뿐

무슨 주제로 헐거운 돈을 만났겠는가

그대의 눈썰미가 마련한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난 뒤로

자주 목이 말랐고 자꾸만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 번도 널 풍족히 누릴 수 없었다 해도

돈이여, 어느새 너는 내 발목을 잡고 있지만

나는 네게서 다시 철저히 배반당하는 꿈을 요즈음도 꾼다

너를 돈이라 말하면 네가 돈이겠느냐

그게 인생의 목표쯤은 아니라고 해도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 문학과지성사, 1988년

 

 


 

 

김명인 시인 / 겨울의 빛

 

 

 

골목 안 국밥집에는 두 사내가 마주앉아 허름한 저녁을 들고 있다,

뚝배기 속으로 달그락거리던 숟갈질이 빈 반찬그릇에서 멎자

한 사내는 아쉬운 듯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붙여 물고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마주앉은 사내는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은 닦아 낼

겨를도 없이 남은 국물을 들이마시고

마지막 깍두기를 씹고 있다, 언제 왔는지 어둠이

깊은 심연처럼 그릇 바닥에 고여

어둑히 내다보면 구겨지는 골목으로 벗어나며

저 사내에게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일까

어느새 웃자란 수염이 차지한 뽀쪽턱을 비껴

추위에 움츠린 겨울의 가등(街燈)들이 무심한 듯

길바닥에 일렁거리지만

불빛이 감추는 망막 때문에 유리창 안쪽으로

따뜻한 것들이 기웃거리는지

아까부터 군청색 작업복의 사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대책 없는 허술한 앞날일 뿐

잿빛 잠바도 모르는 사내들의 길 위로 어디서나

흔해빠진 길들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오고 간다

 

 


 

 

김명인 시인 / 실족

 

 

그 작은 연못에서 그가 실족했으리라곤

누구도 믿지 않았다. 사체는

부패한 채 며칠 만에 떠올랐다

등에 거적대기를 대고 누워 노인은 이제 아무것도

버틸 것이 없다는 듯 검게 팬 눈으로

구름의 흰자위를 뿌옇게 걷어올리고 있다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듯 거칠게 접힌

얼굴이며 목덜미의 주름,

조야한 음식이 간단없이 드나들었을 반쯤 벌린 저 입,

몇 만 톤위 공기를 오염시켰을 그의 숨쉬기가 멈춘

코에서는 뜨물 같은 체액이 흘러

입가 까칠한 수염을 적셔놓았다

마지막 외로움이 비어져나오는지 컴컴한 목구멍으로부터

헛것인 한숨이 희미하게 흩어진다

왜 그런지 스산하게 주먹을 쥐고 있지만

기운이 다 빠져나가버린 손, 어딘가 살고 있을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고 또 누군가 죽음은

연고가 필요없다고 다 끝난 것이라고

평소보다 배나 깨끗하게 닦였을 맨발

위로 그가 헛딛지 않고 걸어갈

하늘 길이 팅팅 불은 채 떠 있다

 

-시집 <바닷가의 장례>1997년 / 문학과지성사

 

 


 

 

김명인 시인 / 향나무 일기장

 

 

연기군 서면 봉산동 그 향나무를 만나고 나서

틈날 때마다 남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버릇이 생겼다

손짓과 표정 사이에 시간을 섞어 그대에게

들키는 내 침묵의 전언처럼

사백 년도 더 된 향나무 한 그루의 내력이

고해 성사로 읽혀진들 스스로 옮겨 앉지도 못해

멸문滅門이 되어버린 이웃과 폐가에게

이 집의 연보를 새삼 들춰 보일 필요가 있을까

한번은 문짝까지 뜯겨져나간 폐가 마당에서 주운

조치원여고 2학년 1반 이영금,

1979년의 학생증으로도 밤늦도록 불 밝히고 앉아

서른서너 살 내 행적 되짚어보았지만

그때 무성했던 가시조차 메말라버린 지금

어떤 습관이 여기 가지 뻗고 살아온

향나무의 일거수라는 것일까

썩은 밑동을 시멘트로 채워 놓고서도

청와(靑瓦)를 잔뜩 이고 선 저 집채를 바라보면

몸의 노쇠가 정신의 퇴화인 양 무겁게 읽혀지지만

흔적조차 깡그리 지워져버린 떠돌이

집들에게는 저쪽 폐가라도

도대체 몇 대가 벋어나갔거나 이울었거나 다시

쌓으면서 무너뜨렸다는 것일까

집이라면 나도 허술한 반백으로만 가구를 들여서

서툰 수화라도 더듬고 싶어지는

이 침묵의 일기장

몸 전체가 고택으로 여기 쭈그리고 앉은 저 향나무나

그 곁 판자로 입을 봉한 훨씬 젊은 폐가에겐

고백하고 싶은 하루하루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보다

향나무는 금세 썩어버릴 서까래에게 못 이기는 척

제 무거운 가지들을 부축하고 섰다.

 

-[문학과 사회] 2003년 가을호

 

 


 

 

김명인 시인 / 주름

 

 

나이답지 않게 팽팽한 얼굴을 쳐다보다

눈가장이에 더께 진 잔주름을 발견하지만

다독일수록 엷어지는 것도 아닌데

목덜미까지 파고든 몇 가닥 실금 가리려 애쓰는 건

그것이 조락을 아로새긴다는 확신 때문,

아무리 변죽을 두드리며 달래더라도 주름에게

하루하루란 윤택한 시간이 아니다

쏟아져 내리는 여울처럼 시원하던 복근이

어느 날 이마며 두 볼에도 흉물스럽게 옮겨 앉는다

손금 하나로 골목을 주름잡았다는 그를 볼 때마다

잔골목이 하도 많은 동네라서 길 잃기 십상인

나도 맨발인가, 아기는 쪼글쪼글한 주름

발바닥까지 휘감은 채 태어난다

울음을 터트리며 종주먹질해대는 말년이 아니더라도

주름은 누구의 것이든 삭은 동아줄인 것을,

그걸 잡고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으로 주름져간다

주름투성이의 손바닥을 옴켜쥐고

저 세상의 아기 하나 지금 막 요람에서 돌아눕는다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에서

 

 


 

 

김명인 시인 / 수심에 길들여지지 않는 장님 물고기

 

 

백 킬로그램이 넘는 돗돔이 잡혀

바닷속 물길을 궁금하게 하지만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기진한 어부에겐

뱃전에 눕혀놓은 가오리가 괴물 같다

추가 도달하는 곳 해저라 해도

상상이 도사리는 깊이라면 경악할 뿐,

수심을 몰라 닿지 못하는

바닥엔 무엇이 사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내가 떨어뜨린 한 편이 가라앉아

심란해진 마음 이리저리 뒤적거리지만

우리 심성 어디에 공포를 동반한 심해가 있어

내려갈수록 캄캄하게 좁혀진다면

나는, 옴팍진 해구를 건너뛰는

장님물고기와 다름없으리!

빛을 엿보는 자 내 안에도 있어

흑암이었을 때 그 기미를 끌어안으면

무언가에 갇혀 있다가 활짝 젖혀진

상상들은 그렇게 이어진다, 심해의 비밀처럼!

저 산봉우리에서 조개 무덤이 발견되지만

일생을 함구한 자의 등을 은밀하게 떠미는

절벽 해구 따로 있을까 싶어 지느러미 꿈틀거린다

 

 


 

김명인(金明仁) 시인

1946년 경북 울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1973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73』 동인을 거친 그는 김창완, 이동순, 정호승 등과 함께 『반시』 동인에 참여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임. 시집 『동두천』 『머나먼 곳 스와니』 『물 건너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 『길의 침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