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병률 시인 / 과녁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8. 17:30

이병률 시인 / 과녁

 

 

사랑이 끝나고 나면

쓰레기 같은 인간과 사랑을 했구나 하고 화들짝 놀란다

 

그게 몇 번이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쓰레기보다 더한 쓰레기가 되어가는 나에게

눈발이 거세게 퍼붓고

밤하늘의 별들이 그 자리를 덮어도

쓰레기는 쓰레기로 쌓인다는 사실이

무섭고도 단조롭게 잊혀만 갔다

 

인생을 끼웠던 바늘들이 녹이 슬어 쌓인다는 사실도 모르고 산다

아름다움을 향해 당겼던 화살들을 꽂지 못하고

거기 흩어져 있음을 모른 채 산다

 

사랑이 끝나면

말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 되어 미쳐 다닌다

 

내가 한 사랑이 겨우 그랬나 싶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 것이 몇 번이었나

 

 


 

 

이병률 시인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따돌렸던 적

한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이병률 시인 / 김밥

 

 

어느 날의 김밥은

굴리고 굴려서 힘이 된다

굴리고 굴려서 기쁨이 된다

 

잘라진 나무의 토막처럼 멋진 날이 된다

 

김밥은 단면을 먹는 것

둥그런 마음을 먹는 것

 

그 안의 꽃을 파먹는 것

 

아픈 날이면 어떤가

안 좋은 날이면 어떤가

김에서는 바람의 냄새

단무지에선 어제의 냄새

밥에서는 살 냄새

당근에선 땅의 냄새

 

아이야

혼자 먹으려고 김밥을 싸는 이 없듯이

사랑하는 날에는 김밥을 싸야 한단다

 

아이야

모든 것을 곱게 펴서 말아서 굴리게 되면

좋은 날은 온단다

 

 


 

 

이병률 시인 /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

 

 

어서 오세요 오랫만에 오셨어요

 

혼자 어느 음식점에 갔다가 난데없는 인사를 받는다

나는 이 가게에 처음 온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묻는다

아, 그냥 우연이겠지

인사와 안부 모두가 내가 속하는 집합의 순간들이겠지

 

한 번만 더 앞뒤가 맞아버리면

여기를 뛰쳐나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늘 드시는 걸로 드릴게요, 라고 한다

나는 수긋하게 그러라고 말한다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바람에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배우로사는 것도 좋겠어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거나 하는 일

삶의 통역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주거나 하는 일

 

나는 여기에 자주 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마주치기 위해

아주 다르게 하고 오기로 한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에서

 

 


 

 

이병률 시인 / 눈사람 여관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에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이병률 시인 / 침묵여관

 

 

나는 여기에 일 년에 한 번을 온다

몸을 씻으러도 오고 옷을 입으려고도 온다

 

돌이킬 수 없으려니

너무 많은 것을 몰라라 하고 온다

 

그냥 사각의 방

하지만 네 각이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제 마음에 따라 여섯 각이기도 한 방

 

물방울은 큰 물에 몰두하고

소리는 사라짐에 몰두한다

 

얼룩은 옷깃에 몰두할 것이고

소란은 소문에 몰두할 것이다

 

어느 이름 없는 별에 홀로 살러 들어가려는 것처럼

몰두하여

 

좀이 슬어야겠다는 것

그 또한 불멸의 습(習)인 것

 

개들은 잠을 못 이루고 둥글게 몸을 말고

유빙이 떠다니는 바깥

 

몰려드는 헛것들을 모른 체하면서

정수리의 궁리들을 모른 체하면서

 

일 년에 한 번 처소에 와서

나는 일 년에 한 번을 몰두한다

 

 


 

 

이병률 시인 / 정착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집을 지을 것이다.

아프리카 마사이 여부족처럼

결혼해서 살 집을 내 손으로 지을 것이다.

 

꽃을 꺾지 않으려는 마음도 마음이지만은

꽃을 꺾는 마음도 마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여자라면 사랑한다고 자주 말할 것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신을 매번 염려할 것이다.

 

내가 여자라면 칼을 들고 산으로 빨려 들어가 춤을 출 것이다.

 

그러다 작살을 뒤고 한 사내의 과거를 헤집을 것이다.

외롭다고 말한 뒤에 외로움의 전부와 결속할 것이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고아로 태어나

이붙 밑에다 북어를 숨겨둘 것이다.

숨겨 두고 가시에 찔리고 찔리며 살다

그 가시에 체할 것이다.

 

생애동안 한 사람에게 나눠 받은 것들을

지울 것이며

생략할 것이다.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중에서

 

 


 

 

이병률 시인 / 사는게 미안하고 잘못뿐인 것 같아서

 

 

거미가 실을 잘못 사용하더라도

 

계절이 한참 지나간 후에도 꽃대가 꽃을 내려놓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그조차도 세상의 많은 조합일지니

나의 잘못이 아니리

 

찬바람이 여름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더라도

그래서 감기로 잠시 아프더라도

 

정녕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당신이 그에게 나머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까지도

 

생각을 만나지 않고 시장에 간 것

나의 잘못은 아니리

 

오후에 붙들려서 길을 따라 나선 것은

조금 맨발이 되자는 것이었으니

 

마음이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 휘감기는 것도

그러곤 구덩이에서 꺼내지는 것도

찬바람이 시키는 계절의 일들일 테니

 

애써 모른 체한들

이 모든 것 나의 잘못은 아니리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7), 문학과지성사

 

 


 

이병률 시인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산문집 『끌림』 등. 2018. 제6회 발견문학상.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 발견문학상을 수상.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 MBC라디오 이소라의 FM 음악도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