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시인 / 남풍에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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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 / 남풍에게
풀잎이 언제 잠 깨는지를 말해 주겠니 흙이 가장 그리워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겠니 꽃이 초록에서 빨강으로 가는 시간을 말해 주겠니 복사나무가 복사 열매를 다는 셀렘을 말해 주겠니
나비가 앉고 싶었던 꽃이 어느 꽃인지를 말해 주겠니 나무의 움이 분홍이 될 때의 숨소리를 말해 주겠니 제 입안에 고인 단물을 삼키지 않고 열매로 익히는 풀꽃의 오랜 참음을 말해 주겠니
강물도 돌멩이도 찔레 덩굴도 화안한 봄날 다친 나무가 아픔을 이기고 새살을 깁는 힘을 꺽인 팔이 들고 있는 익은 과실의 무게를 말해 주겠니
이기철 시인 / 개나리보다 내 마음이 먼저 피는 이유를 아느냐
봄이 오면 산벗꽃보다 내 마음이 먼저 피는 이유를 아느냐 봄이 오면 여울물보다 내 마음의 물소리가 더 높은 이유를 아느냐
살다보면 가까운 곳보다 먼 곳이 그리울 때가 있다 흐르다가 휘어지는 물이 있듯이 가다가 뒤돌아보는 바람도 있다
무슨 그리움 심어놓았는지 처마들은 모두 남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해 있는 동안 라일락은 보랏빛 생애를 가지 끝에 완성한다
바람 끝에 손 내밀면 가슴까지 젖어오는 꽃빛 이 봄에 내 아는 사람들 모두 귀 속까지 화안한 개나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처음인 듯 꽃나무들은 가장 예쁜 꽃을 가지에 달고 사람들은 단추 속에 이쁜 강물소리를 씻어 담는다
잃어버린 것들이 모두 꽃으로 피어오는 봄날 산수유보다 내 마음이 먼저 피는 이유를 아느냐 삶이 가벼워져서 아지랑이가 되는 봄날 개나리보다 내 마음이 먼저 피는 이유를 아느냐
이기철 시인 / 이름들
쥐똥나무 가문비나무 물푸레나무라는 이름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황산가스에 그을린 그것의 잎새는 아름답지 않다 아가위꽃 등꽃 명자꽃의 이름은 아름답다 그러나 산성비에 시들어 떨어지는 그것의 꽃잎은 아름답지 않다 저 모든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지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은 누구 때문인가 들쥐 때문인가, 뱀 오소리 너구리 때문인가 그것은 누구 때문인가
푸른 잔디 질경이 어욱새 속새의 방죽은 아름답다 그러나 흐린 물, 썩은 쥐, 둥둥 뜨는 죽은 물고기의 개여울은 아름답지 않다 이슬비 싸락눈 별똥별의 이름은 아름답다 그러나 매연으로 어두워진 하늘, 거기서 내리는 이슬비, 싸락눈은 아름답지 않다 누구 때문인가 까마귀 때문인가, 까치 비둘기 개똥지빠귀 때문인가 그것은 누구 때문인가
누구 때문인가 그것은 우리들, 우리들, 바로 사람 때문이다
이기철 시인 / 산은 꽃으로 말한다
저 붉은 언어를 보았나요 더 뜨거우면 흙이 데일 저 산의 언어를 들었나요 침묵하는 듯하면서도 침묵하지 않고 혼자서도 즐거운 산의 하루를 만났나요 산새알도 노루새끼도 보듬어 키워주는 산의 마음을 아시나요 함께 가다가도 갈라지고 갈라졌다가도 다시 모이는 개울물의 노래를 들었나요
지칠 줄 모르는 상수리나무의 춤을 보았나요 일찍 깬 비옷나무가 햇빛에 목욕하는 것 보았나요 가시나무를 어루만지고도 찢기지 않은 바람의 옷자락을 만났나요 온종일 노래해도 못다 한 새의 노래를 들었나요
산에 사는 사람의 작은 마음을 아시나요 산 속에 묻은 산사람의 꿈을 보았나요 은빛 말을 담고 입 오므린 열매들의 마음을 아시나요 꽃이 있어 저녁이 환한 산의 마음을 아시나요
이기철 시인 / 주막
주막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이라 써야 제격이다 그래야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가 다 모인다 그래야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붓장수가 그냥은 못 지나가고 방갓 패랭이 짚신감발로 노둣돌에 앉아 탁주 사발을 비우고 간다 그래야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들이 주모와 수작 한번 걸고 간다 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 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가 대추나무 돌담에 소지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 잘 익은 옥수수가 수염을 바람에 휘날려야 제격이다 돌무지 너머 참나무골에 여우가 캥캥 짖고 누구 비손하고 남은 시루떡 조각이 당산나무 아래 널부러져 있어야 제격이다 시인 천상병이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안 가고 나뭇덩걸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시를 쓰고 그 발치쯤엔 키다리 시인 송상욱이 사흘 굶은 낯으로 통기타를 쳐야 제격이다 주막은 때로 주먹패 산도적이 공짜 술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아야 제격이다 주막, 주먹 왈패 풍각쟁이 벙거지들이 다 모인 酒幕 지까다비 면소사 고지기 벌목장들이 그냥은 못 가고 탁주 한잔에 음풍농월 한가닥 하고야 가는 酒幕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인생에 진 사람들이 인생의 얼굴을 몰라 아예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무명 베옷 기운 등지게 자락을 보이며 떠나가는 酒幕
ㅡ『영원 아래서 잠시』(민음사, 2021)에서
이기철 시인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이기철 시인 / 네가 있어
너를 어찌 그립다고만 말할 수 있느냐 너는 햇빛 너는 향기 너는 물결 너는 초록 너는 새 움 너는 이슬 너는 꽃술 너는 바람 어떤 언어로도 너를 다 말할 순 없어 너는 봄비 너는 볕살 너는 이삭 너는 첫 눈 너는 붉음 너는 노랑 너는 연두 너는 보라 네가 있어 세상은 아름답고 네가 있어 세계 속에 이름 하나인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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