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수빈 시인 / 사과사회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9. 20:26

박수빈 시인 / 사과사회

 

​ 언제까지 우리로 둘러싸여 있을까 우리 안에 많은 사과들이 있다 꼭 둥글지 않아 일그러진 사과 꼭 붉지 않아 빛바랜 사과 이인삼각을 하듯 줄 묶인

 우리 안에 우리 있다 꽃 냄새에 벌레 꼬이고 알알이 알맹이 되려 앙, 주먹을 닮았다

 베어 문 사과는 침략과 다를 바 없어

 낙과는 난민, 분쟁의 생채기, 굳건한 우리는 안으로 친하고 밖으로 추악한 무리, 상대가 다치든 말든 입맛이라며 깨무는 이빨 자국

 피하는 심정 엮이고 싶지 않은 심정 어정정 사과도 않는

 뒷모습이 마치 얼굴이 된 듯이 사과 안의 나, 너, 우리, 가면들

 사과는 화약고

 사과는 밥그릇 아작!

 

 


 

 

박수빈 시인 / 무엇이 꽃을 피우나

 

 

안스러움은 붉은 심장을 꺼내어 밖에 달고 있다

나비가 날아간 헛꽃에 귀뚜라미가 운다

 

내가 꽃이라 부른 것은 문 밖의 눈사람

 

너를 사랑해, 라고 문고리 흔드는 바람, 어긋난 2번과 3번 뼈마디의 통증

 

내가 시라고 여기던 플랫폼

길이라고 여기던 것도 매번 놓치는 기차

 

#과 b처럼 불러 모은 조연들

물구나무 선 물컵, 절벽에 묶인 구두끈, 석류알 같은 방 안의 가족들,

앙코르와트의 바위를 뚫고 자란 스펑나무의 우로보로스 우로보로스

 

문 밖에서 굵은 기둥으로 서서 나를 기다리는 바람

 

- 2015년 <시와 문화> 봄호

 

 


 

 

박수빈 시인 / 다시 운주

 

 

기울어진 시간들이 돌돌돌

저 돌부처는 머리 없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구름이 머물면 구름이 아니듯이 사랑도 저러할까

흩어진 조각들이 살아 움직일 듯하다

 

그림자는 바닥을 안고 묵언수행

믿음이 있으면 자취 없이도 사는지

 

목탁처럼 내 머리통을 두드리면 출렁이는 공명

휘도는 바람은 휘어진 쪽으로 자꾸 불고

돌보기를 돌 보듯

 

한때 환희였던 끊어진 안부 껴안은 납골

엉킨 말들의 뼈가 뱀처럼 똬리를 튼다

비오고 바람 부는 기억의 환지통

 

돌돌돌 구르는 풍경 더욱 선명해지고

갈비뼈 사이에 바람구멍이 사리처럼 자라고

 

*부처가 악마를 항복시키는 인상(印相). 왼손은 펴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펴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박수빈 시인 / 동굴주의자

 

 

 난 말야, 인생 한 방이라고 생각해, 이 바닥은 도무지 눙칠 데도 없는 막막함이지만, 뱀은 좋겠다 생각한 적이 있어, 페이스오프, 불분명한 전후, 또 뭐가 뱀을 사랑스럽게 하는지, 그러고 보면 태양은 왜 반대편에서만 뜨는지, 피는 부글거리고 추리닝 무릎은 자라고 비닐 장판은 들러붙고, 오늘도 나는 라면을 먹어. 무료하게 신문을 넘기며 뒷장에 숨어있을지 모를 문에 밑줄 그으며 주인집 개 짖는 소리와 나의 두런거림, 외롭지 않은 나는 지망생. 입맛이 없어도 남김없이 국물까지 먹어. 젊어 고생은 공짜.

 

 면접 보고 돌아오는 골목은 어둡고도 길다.

 방에 들어서면 절로 몸이 공처럼 웅크러진다.

 바람을 넣는 실낱 같은 구멍뿐.

 

 


 

 

박수빈 시인 / 도마

 

 

결/결/히/잘/근/잘/근/

습관처럼 굳은 날들에 칼집을 새기겠다.

 

뚝뚝 흘리는 눈물 내게로 와,

독을 품고 검붉은 내장을 꺼내

물컹 잘릴 것들

피를 질질 흘릴 것들

단면의 삶들은 숨이 짧다.

 

아픔에 떨어져 나가는 너의 등을

오싹 번쩍 후끈 탕탕 리드미칼

애써 즐겨 노래하마.

 

등뼈에 파이는 칼자국

네 것이냐? 내 것이냐?

피는 살아 길이 된다.

 

모진 칼날 받아내는 절두의 삶

괜히 에둘러 빙 돌리지 않겠다.

 

수직의 길만 가련다.

오늘도 납작 드러누우마

 

 


 

 

박수빈 시인 / 매장문화를 생각함

 

 

지하4층 지상 10층의 백화점

주차장에 진입하며 거대한 납골묘를 만난다

몸 없는 묘혈처럼 빈 차들이

네 자릿수 위패들이 줄 맞춰 생매장

긴 하품을 통과하면 붉은 카펫 휘황한 샹들리에

목걸이를 해보다 반지를 껴보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에스컬레이터가 나를 먼저 기다린다

모피코트가 마네킹을 휘감고

루이비똥 가방이 구찌 립스틱이 샤넬 구두가

나를 휘감다가 한눈팔린 선글라스

이디오피아 수프리모 향이 옆에서 날름댄다

커피를 손에 들고도 왜 자꾸 목이 마를까

구슬아이스크림까지 양손에 쥐고

층층이 매장을 둘러볼 때면

사랑합니다 고객님

배고프고 다리 아픈데 식당은 지하와 맨꼭대기 층에만

시계와 창문이 안보이고 거울이 잔뜩

까무룩 시간이 멎고 내부에 갇힌 군중

여기는 외국인 묘역

프라다 알마니 페라가모 펜디 코치.....

납골묘마다 생전의 이름이 쓰여 있다

 

 


 

 

박수빈 시인 / 로그인

 

 

입력하신 아이디 혹은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민번호 다시 누르면서 미운 일곱 살

공인인증 동의할 즈음 19세 이하 불가

프로그램 재설치할 때 불혹은 유혹

대/소문자 구분하여 입력해도 자꾸 달아난다

 

내가 나에게 가는 길이 막혀 있다

만져보고서야 가시며 꽃잎에 맺힌 이슬도

조작된 것 알 듯

나는 조화

진정 장미는 없다

향과 독 함께 하는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에 나는

또 다른 미끄러지는 나들의 관계일 뿐

 

짝퉁1 짝퉁21 짝퉁34 수많은 탈들

내 안의 꿈틀대는 생각과 소리와 냄새

걸음 디디면 너도 내딛고

잡으려 뛰어가면 너도 뛰고

뛰느라 배가 고파

고파서 또 빙글

손에 익을만하면 업데이트되는 그림자

클릭 클릭 클릭

 

 


 

 

박수빈 시인 / 무엇이 꽃을 피우나

 

 

안스러움은 붉은 심장을 꺼내어 밖에 달고 있다

나비가 날아간 헛꽃에 귀뚜라미가 운다

 

내가 꽃이라 부른 것은 문 밖의 눈사람

 

너를 사랑해, 라고 문고리 흔드는 바람, 어긋난 2번과 3번 뼈마디의 통증

 

내가 시라고 여기던 플랫폼

길이라고 여기던 것도 매번 놓치는 기차

 

#과 b처럼 불러 모은 조연들

물구나무 선 물컵, 절벽에 묶인 구두끈, 석류알 같은 방 안의 가족들,

앙코르와트의 바위를 뚫고 자란 스펑나무의 우로보로스 우로보로스

 

문 밖에서 굵은 기둥으로 서서 나를 기다리는 바람

 

 


 

박수빈 시인

광주에서 출생, 아주대 국문과 박사,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활동, 《열린시학》으로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비록 구름의 시간』. 평론집 『스프링 시학』 『다양성의 시』. 학술서 『반복과 변주의 시세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상명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