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령 시인 / 카페 간다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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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령 시인 / 카페 간다
미소 짓는 하소연하는 고백하는 그런 표정들이 떨어진 꽃잎처럼 무심해지는 그만큼 떨어져 앉는 리필한 커피처럼 오래 남은 자리, 유령
이미 647번 도로 어딘가를 달려 한 모금만 더 마시면 영원히 잠들지 않을 수 있어 햇살이 각성제처럼 쏟아져 속력을 높여 높여 그때 탁, 한 번 두 번 공중제비 전복을 반복하면 제자리
해미읍성 부근에서 우리는 출발하는 거지 여기를 넘어가도 돼? 라고 나에게 물었을 때 이미 너를 잡고 독기 오른 수풀 사이로 깊어져 너의 발목에 부어오르는 독으로 나의 입술은 검푸르러
아무리 막아도 소음이 흘러 들어오는 낮 과 어디를 비쳐도 경고 표지가 박혀 있는 밤 과 차창으로 해미읍성의 회화나무 회화나무에 매달린 천명의 목을 하나 둘 세어봐 어디서나 시작되고 어디서나 사라지는 647번 도로가 안개처럼 흘러
차를 세우고 ‘무단출입 금지’라는 울타리를 넘어 초원 위에 눕지 목초들이 비싼 침대의 스프링처럼 꺼짐도 없이 소리도 없이 등을 찔러 줄줄 묵은 잠이 흘러내릴 때 자 너는 나를 갈라 달려온 거리만큼 달려갈 거리만큼 나를 적출해 비명은 멈출 수 없어 황홀,한 거야 내장들이 재생되는 꿈
들어온 적 없어 나간 적 없어 식지 않는 잔 유령,
647번 도로가 뱀처럼 꼬리를 흔들어
장무령 시인 /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태도
1 그는 숲속에 누워 있다 백팔십칠 센티미터 백 킬로그램의 거구를 맨 처음 집으로 삼는 것은 파리다 파리 한 마리당 천 개 이상의 알을 낳을 때 그는 변색과 경직의 단계를 지난다 부화한 구더기들이 단백질과 혈액을 맹렬히 먹어치운다. 새들은 인대를 물어뜯고 날아오른다 유충의 왕성한 식욕과 날짐승들의 예리한 이빨로 그는 점점 바람처럼 가벼워진다 그는 그가 아닌 것으로 향한다 그가 아닌 것이 그에게로 스며든다 생명으로 생명에 진입한다 바람에 스민 습기에 맨 처음 입을 대는 흙과 새싹의 값
2 * 사망금손해배상보험 가)사망위로금: 서울은 대법원 판례를 기준으로 8000만원. 지방 대도시 소도시 시골로 갈수록 책정 액수 기준은 낮아짐. 나)사망기여도: 사망의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은 백분위로 산정됨. 다수의 전문의들이 종합적으로 면밀하게 검토. 다)일시손해금: 칠십 세 이상일 경우는 생산 능력이 없으므로 거의 반영되지 않음.
(사망위로금×사망기여도백분위)+일시손해금+장례금=사망금손해배상액(생명값)
장무령 시인 / 구멍
다만 송곳이었다 송곳이 방송국 붉은 담장에 구멍을 뚫었다 이십년 근속의 경비원이 달려나갔다 생방송을 하던 여자 아나운서의 다음 말들은 모두 구멍 속에서 계통을 이루었다 호기심 많은 이들은 구멍 난 얼굴을 잡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른 자들입니다 다 떼어내 버리지요 내시경으로 구멍을 살펴보던 의사의 칼이 장벽에 붙은 다른 자들을 잘라냈다 성전을 위해 사람들은 방송국 베란다에 내놓은 화초에 햇살을 끌어오는 일을 기꺼이 포기했다 화초가 시든 자리 넓어진 자리만큼 틈이 생겼다 그 사이 도둑이 들었다 사람들은 꼼꼼히 살폈으나 방송국 안은 그대로였다 다녀간 흔적만 남은 도둑이었다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던 수리공은 버튼식 자물쇠를 달고 이젠 안전하다고 말했다 사라진 것은 구멍뿐이었다
장무령 시인 / 의자는 엉덩이보다 높이 있다
영국인 론 어레이드*의 의자는 장관이거나 국회의원 시장 같은 세상의 빛나는 이름들이 줄 맞추어 기다리는
사람 대신 장미 삼백육십 송이를 올려놓은
일산 중앙시장 순댓국 집 앞 양지바른 곳에 기대고 있는 엉덩이보다 높은 의자
은밀하게 도난 경보장치는 앉아 있다
*론 어레이드(Ron Arad)는 영국의 디자이너로서, 그가 만든 의자는 억대를 호가한다.
장무령 시인 / 창문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오전도 아니었다 오후도 아니었다 백년 전 호텔 창문을 열고 노을을 기다렸다 백년 후 호텔 창문을 열고 노을을 기다렸다 우리는 불결을 나누었다
침대 아래 해변을 무너뜨린 주문진 바다가 있었다 파도를 따라 침대가 출렁일 때마다 분비물이 쏟아졌다 손가락은 자꾸 길어져 천정에 닿았다 벽마다 물감이 흘러내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 한 번도 맡은 적 없는 냄새
기록은 색과 냄새를 갉아 먹었다
아홉 번째 최종 면접엔 여섯 개의 지루한 방이 준비돼 있었다 미소 짓는 총장의 눈동자에선 비린내가 났다 전화를 받고 침대에 모로 누웠다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너의 손가락 등 뒤가 따뜻할 때 너에게 말했다 이젠 늙은 정규직이야 너의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에서 흘러내렸다 너의 손가락이 밀물처럼 바다로 사라질 때 창밖이 번쩍였다
가장 밝은 빛은 창밖을 감춘다
창문을 열고 기다리는 것을 본다 창문이 있고 안에서 밖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은 사후적으로 번쩍인다
창문이 있고 바짝 마른 침대에 앉는다 기다린다 본다 전기톱의 출력을 최대로 높인다 창문에 톱날이 파고든다 개미들이 줄지어 간다 창문이 아니다 안도 밖도 아니다 한 조각 먹이를 물고 기다림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고 꾸벅꾸벅 불결하게 간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겨을호 (창간호) 발표
장무령 시인 / 무간無間 쁘램요가원 입구 2024년 10월 오후 6시와 7시 사이에서 향초 냄새가 났다 실험 소극장으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은 삐걱대는 소리와 향초 냄새로 어두웠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같은 구조에서 너는 임의적이고 형식적이다 사라진다 너를 불태우는 향초 냄새는 무작위하고 너는 예고 없이 도래한다 순식간에 나는 소극장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있다 객석에 앉는 나는 옆자리에 앉은 나와 생소하다 핀 조명이 어둠을 찌른다
학생회관 앞 플라타너스를 지나치는 너의 발걸음은 뒤꿈치가 보도블록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가 학교 정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타너스 나뭇잎은 세상의 빛을 가르고 갈라 벤치에 주저앉혔다 내가 너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 방으로 들어와서 그의 날개를 펴고 내 몸 위에 누웠어요*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강물에는 등 굽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물고기가 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강의실의 언어는 높은 언덕에서 테라스의 등을 켜고 있었다
낮이 길어질수록 방은 깊어져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가끔 카드 빚을 독촉하는 전화가 왔고 부근에 있는 여고의 학생들은 담배를 필 때마다 나의 자취방 벽에 기대었다 선풍기도 다 팔린 여름밤 독산동 골목엔 감출 수 없는 소리들이 팔리지 않는 물건처럼 대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낮이 짧아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의 피가 동네 입구까지 물들였다는 소식이 방바닥까지 내려왔다. 나는 피에 젖은 소식을 동아줄처럼 잡고 방 밖으로 기어 올라갔다
무게 없는 칼에는 방향이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거기 있는 골목을 베러 갔다 방으로 돌아올 때 간혹 표정 없는 여고생이 담배 한 개비씩 빌려 가곤 했다 내가 가장 슬플 때 너는 무표정했다 내가 가장 기쁠 때 너는 무표정했다 기차 안에서 아버지가 갑자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었다는 기억을 끊었다는 것은 나의 일방적 생각일 수 있었다
핀 조명에 담배 연기가 퍼진다 서둘러 담배를 빼앗는 나를 노려보던 아버지가 무대 위에서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가 죽은 것은 담배를 피워서가 아니다 내가 죽은 것은 무대 위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아이슬란드 겨울 평원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나도 모르게 울퉁불퉁 얼어붙고 싶었다 한 번은 사하라 사막 모래 언덕에서 길을 잃고 낙타에게 파먹히고 싶었다 유치할수록 빛나고 헛말일수록 날카로운 플라타너스 아래 벤치에 앉으면 너가 가을 서리처럼 어깨에 닿았다 산속으로 도망친 영문과 선배를 산짐승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풍문이 들렸다 몸에 불을 지르고 강남성모병원에 누워있던 고등학교 동창이 침대 바닥을 치던 탁 탁탁, 나는 온 힘을 다해 뒷걸음쳤다 뒷걸음치면서 넘어지지 않는 법은 바닥을 피하는 법은 터득될수록 달콤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두통이 혈압이 높아서일 때 혈압은 나의 달콤함 때문이다 나는 달콤해서 비대해졌다 달콤해서 쭈글쭈글해졌다 술값을 건네다 기어코 달콤한 말을 밑장 깔고 학생들 술자리를 빠져나온다 대청마루에서 올려다본 하늘에 빨려 들어가 나의 뒤꿈치가 들썩일 때 뒤꿈치에 부적처럼 붙었던 달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달콤 서슴없이 뒷주머니에 구겨 넣을 수 있는 달콤 사람은 자고로 기술을 배워야 사람 구실을 혀어 면서기라도 혀먹을려면 글씨 기술이 있어야 뎌어
술집 앞에서 향초 냄새가 난다 사실 술집 앞은 거기서부터이기 위한 단순조건이다 너가 타오르는 예고 없는 순간의 자국이다 어두운 객석에 앉았던 그때 세울 수 없는 집을 세운다 세울 수 없는 집의 샐 수 없는 방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최초의 고백을 반복한다 말하지 못합니다
고라니가 튀어오른다 살기 위해서 헤드라이트에 포박된다 더욱 살기 위해서 자동차 정면을 들이 박는다 두 동강 난 고라니 국도에 기원을 쏟아버린 가벼운 고라니 머리를 달고 있는 몸뚱이가 사뿐 차 앞에 뛰어내린다 꼬리를 달고 있는 몸뚱이가 사뿐 차 뒤에 뛰어내린다 하나의 몸뚱이와 하나의 몸뚱이가 차 지붕 위에서 붙었다 떨어진다 떨어졌다 붙는다 도래한다
객석에 앉았다 앉는다 앉겠다는 나에게서 비켜나 나는 객석에 앉다
암전 무대 조명을 따라 무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너가 도래한다 나는 기원이 없고 눈은 초롱하다
* 연극 <신의 아그네스> 중에서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겨울호 (창간호) 발표
장무령 시인 / 평화
돼지 정수리에 도끼가 박혔다 도끼를 받은 돼지가 대문 밖 사잣밥을 먹으며 피를 흘렸다 정수리에 박힌 도끼 끝으로 갯바람이 곤두섰다 딱딱한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던 나의 손끝에 돼지의 피오줌 냄새가 감겼다 블라우스 안 갈매기 떼가 그녀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블라우스 위 꽃잎들이 손을 스칠 때마다 녹아 내렸다 나의 시선이 오래 말린 북어 눈알처럼 수평선에 매달렸다 방파제 끝 낚시꾼의 갯지렁이를 낚아챈 다방 아가씨 스쿠터 엔진 소리가 달려왔다 대문 앞 어둔 바다 흰 구더기가 환히 길을 트고 있었다
장무령 시인 / 무르만스크*에서 심다
베란다의 화분이 거실을 본다
마지막 꽃 떨어뜨릴 힘을 수맥에 끌어 모을 때 갑자기 쏟아진 폭우처럼 길거리 한복판 한 번의 통곡과
방사선 같은 햇빛 스며드는 아침마다 욕조의 물이 빠지지 않는 불에 타오르는 세포들이 손톱 끝까지 전이되는 집, 망부석처럼 딱딱해지는
떨어진 손톱을 주우면서 더듬어가는 골목 안 성인용품 가게의 분홍 네온사인을 지나 새벽까지 문을 열던 우동 집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본뜨다
굶은 들짐승들이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목을 파고든 이빨이 혈관을 타고 꿈속으로 흘렀다
순록의 머리를 쓰고 얼어붙은 눈뭉치가 정수리에 망치처럼 내리 꽂히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을 달려,
해 뜨지 않는 무르만스크 푸른 극야極) 도살장 소처럼 해체된 몸을 걸어놓는다
오로라 시반**이 떠올랐다
화분이 나를 심는다
*Murmansk: 지구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사미어(무르만(murman)이 어원으로도 추측, 러시아 최북단의 도시. ** 사람이 죽은 후에 피부에 생기는 옅은 자주색의 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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