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정하 시인 / 사랑의 우화 외 9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9. 20:49

이정하 시인 / 사랑의 우화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 비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이정하 시인 / 너의 모습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을 모르겠다

네가 가까워질수록

너를 모르겠다.

 

멀리 있어야 산의 모습이 또렷하고

떠나고 나서야 네 모습이 또렷하니

어쩌란 말이냐, 이미 지나쳐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인데.

 

벗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끌고 온 줄이야.

산그늘이 깊듯

네가 남긴 그늘도 깊네.

 

 


 

 

이정하 시인 / 섬

 

 

그대 내게로 와서

섬이 되었네

 

내 마음 거센 파도로 일렁일 때마다

잠겨버릴 것 같은 섬,

그리움으로 저만치 떠 있는,

 

늘 주변만 배회하다

끝내 정박하지 못할 섬

언제쯤 나의 작은 배는

거기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이정하 시인 / 별에게 묻다

 

 

밤이면 나는 별에게 묻습니다.

사랑은 과연 그대처럼 멀리 있는 것인가요.

내 가슴속에 별빛이란 별빛은 다 부어 놓고

그리움이란 그리움은 다 일으켜놓고

당신은 그렇게

멀리서

멀리서

무심히만 있는 겁니까.

 

 


 

 

이정하 시인 / 한밤에서 새벽까지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난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도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이 없다

 

우리들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종소리

잠에 취해 혼미한 새벽

잠결에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저 맑은 종소리는 도대체 누가 울리는 것인가

 

 


 

 

이정하 시인 / 사랑

 

 

마음과 마음 사이에

무지개 하나가 놓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이정하 시인 / 숲

 

 

네 안에서 너를 찾았다

 

네 안에 갇혀있는 것도 모른 채

밤새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헤매 다녔다

 

벗어날 수 없는 숲

가도 가도 빠져나갈 길은 없다

 

묘한 일이다

그토록 너를 찾고 다녔는데

너를 벗어나야 너를 볼 수 있다니

 

네 안에 갇혀있는 것도 모른 채

나는 한평생

너를 찾아 헤매 다녔다

 

 


 

 

이정하 시인 / 마음열쇠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은 아주 오랫동안 잠겨 있었으므로

자물쇠에 온통녹이 슬어 있었다

 

그 오래된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마음이라는 열쇠밖에 없다

녹슬고 곪고 상처받은 가슴을 녹여

부드럽게 열리게 할 수 있는 것은

따스하게 데워진 마음이라는 열쇠뿐

 

닫혀진 것을 여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다

 

 


 

 

이정하 시인 / 저녁별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너를 바라보는 기쁨만으로도

나는 혼자 설레였다.

 

다음에 또 너를 보았을 때

가까워 질 수 없는 거리를 깨닫고

한숨지었다.

 

너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내 마음엔

자꾸만 욕심이 생겨나고 있었던거다.

 

그런다고 뭐 달라질게 있으랴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당장 숨을 거둔다 해도

너는 그자리 그대로

냉랭하게 나를 내려다 볼 밖에

 

내 어두운 마음에 뜬 별하나

너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큰 아픔이기도 했다.

 

 


 

 

이정하 시인 / 헤어짐을 준비하며

 

 

울지마라 그대여,

네 눈물 몇 방울에도 나는 익사한다.

울지마라, 그대여

겨우 보낼 수 있다 생각한 나였는데

 

울지마라, 그대여

내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차마 너를 쳐다볼 수가 없다.

 

 


 

이정하 시인

1962년, 대구 출생.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원광대학 재학중이던 198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이 되어 눈물만 글썽이게 하는가』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등. 산문집 『우리 사는 동안에』 『소망은 내 지친 등을 떠미네』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