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시인 / 사랑의 우화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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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시인 / 사랑의 우화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 비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이정하 시인 / 너의 모습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을 모르겠다 네가 가까워질수록 너를 모르겠다.
멀리 있어야 산의 모습이 또렷하고 떠나고 나서야 네 모습이 또렷하니 어쩌란 말이냐, 이미 지나쳐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인데.
벗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끌고 온 줄이야. 산그늘이 깊듯 네가 남긴 그늘도 깊네.
이정하 시인 / 섬
그대 내게로 와서 섬이 되었네
내 마음 거센 파도로 일렁일 때마다 잠겨버릴 것 같은 섬, 그리움으로 저만치 떠 있는,
늘 주변만 배회하다 끝내 정박하지 못할 섬 언제쯤 나의 작은 배는 거기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이정하 시인 / 별에게 묻다
밤이면 나는 별에게 묻습니다. 사랑은 과연 그대처럼 멀리 있는 것인가요. 내 가슴속에 별빛이란 별빛은 다 부어 놓고 그리움이란 그리움은 다 일으켜놓고 당신은 그렇게 멀리서 멀리서 무심히만 있는 겁니까.
이정하 시인 / 한밤에서 새벽까지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난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도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이 없다
우리들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종소리 잠에 취해 혼미한 새벽 잠결에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저 맑은 종소리는 도대체 누가 울리는 것인가
이정하 시인 / 사랑
마음과 마음 사이에 무지개 하나가 놓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이정하 시인 / 숲
네 안에서 너를 찾았다
네 안에 갇혀있는 것도 모른 채 밤새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헤매 다녔다
벗어날 수 없는 숲 가도 가도 빠져나갈 길은 없다
묘한 일이다 그토록 너를 찾고 다녔는데 너를 벗어나야 너를 볼 수 있다니
네 안에 갇혀있는 것도 모른 채 나는 한평생 너를 찾아 헤매 다녔다
이정하 시인 / 마음열쇠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은 아주 오랫동안 잠겨 있었으므로 자물쇠에 온통녹이 슬어 있었다
그 오래된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마음이라는 열쇠밖에 없다 녹슬고 곪고 상처받은 가슴을 녹여 부드럽게 열리게 할 수 있는 것은 따스하게 데워진 마음이라는 열쇠뿐
닫혀진 것을 여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다
이정하 시인 / 저녁별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너를 바라보는 기쁨만으로도 나는 혼자 설레였다.
다음에 또 너를 보았을 때 가까워 질 수 없는 거리를 깨닫고 한숨지었다.
너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내 마음엔 자꾸만 욕심이 생겨나고 있었던거다.
그런다고 뭐 달라질게 있으랴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당장 숨을 거둔다 해도 너는 그자리 그대로 냉랭하게 나를 내려다 볼 밖에
내 어두운 마음에 뜬 별하나 너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큰 아픔이기도 했다.
이정하 시인 / 헤어짐을 준비하며
울지마라 그대여, 네 눈물 몇 방울에도 나는 익사한다. 울지마라, 그대여 겨우 보낼 수 있다 생각한 나였는데
울지마라, 그대여 내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차마 너를 쳐다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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