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심인숙 시인 / 육개장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9. 21:16

심인숙 시인 / 육개장

 

 

동지섣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일가친척이 모이고 조심스레 호상이라는 말이 오갔다

유복자인 아버지는 술에 취해 울다 웃다 했다

사촌들 간에 크게 한 번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성당에서 온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찬송가를 불러댔다

육개장과 삶은 돼지고기가 들어오고

문상객들의 전화가 이어지면서

서먹하던 공기는 빠르게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벌써 강 건너에서 말없이 웃고 계셨다

배달된 하얀 한복과 버선을 몸에 걸쳤다

할머니는 나에게 처음으로 옷 한 벌을 선사하신 셈이다

어지러운 신발 정리를 하다가 문득,

지금이 무슨 잔치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밤이 으슥해서야 선아 언니와 나는 벌건 고깃국물에

뜨거운 밥을 두 공기나 말아먹었다

얼얼한 육개장 속으로 삼일장이 지나가고 있었다

 

 


 

 

심인숙 시인 / 그림자놀이

 

 

 역전, 구겨진 광장 속으로 한 사내가 들어온다

 

 절룩거리는 발걸음이 군중 속을 파고들고 있다 나를 봐! 사내의 눈빛은 짙다 몸이 긴 그림자다 그늘을 드리운 시간은 무겁고 느릿 하다 걸어, 걸어가는 사내, 사내의 허름한 몸짓에 찬바람이 모였다 흩어진다 햇빛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친다 용케 내민 손 그림자마 저 거두려고 한낮이 빠르게 증발하고 있다 사방이 하얗게 부서져 나간다 잠시 사내의 머리가 없다 목덜미가 없다 사내는 서툰 발자국 조차 남기지 못한다 사내가 광장 끝을 맴돌 때 도로 표지판이 푸른 은행잎 하나 떨어뜨린다 사내는 사라져간다

 

 너는 어디에 있니?

 아이들의 맨드라미 꽃대를 치고 가는 소리, 국기게양대 위로 날아가는 새떼의 눈 홀김 소리, 양떼구름이 활짝 펴지는 소리

 

 다 지워지지 못한 몸

 초저녁달이 사내의 굽은 등에 스며든다 사내는 어둠 속, 제 그림자를 모두 흘려보내고 있다 이윽고 얼굴이 드러날 것이다

 

 


 

 

심인숙 시인 / 찻잔을 모자로 쓴 여자

 

 

 외곽으로 떠밀려 왔네

 

 두서없던 여자의 눈망울은 그새 해거름에 걸터앉았네

 

 여트막한 개울과 늦가을의 철길이었겠네 붉은 건널목을 황망히 건너와 송전탑 앞으로 이곳 호랑가시나무 앞으로 와,

 

 한 줄 울음을 넘기는 찻잔

 찻물을 우려내는 우주

 

 찻잔에 담긴 오해, 찻잔에 담긴 가계(家), 찻잔에 띄운 메꽃이었나 찻잔의 줄무늬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여자가 있네

 찻잔이 종이배가 되고 찻잔으로 물살을 헤엄쳐가는 목이 긴 여자가 있네

 

 무심한 빌딩 속 테이블 모퉁이

 줄무늬 모자를 쓴 찻잔 하나, 이제껏 놓여 있네

 

 


 

 

심인숙 시인 / 벽

 

 

금간 벽을 쿵, 두드려본다

문과 문 사이의 벽이

나뭇잎들을 화들짝 틔워올린다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시간들

눈 먼 뻐꾸기시계가 튀어나온다

식탁에서 지워진 웃음소리가 살아난다

한 토막 가시처럼 발라놓은 햇살

바람을 일으키며 무궁화열차가 지나간다

해피가 컹컹 짖어댄다

실로폰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어스레한 저녁으로

기울어오는 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숲속에 지붕을 올려

산새와 별들을 벽 속에 드리운다

연둣빛 나뭇잎들이 찰랑거린다

낙타의 불룩한 등이 걸어 들어온다

사이렌 소리가 가끔 울려퍼진다

문과 문 사이의 벽에

한 사람이 머리를 기댄 채

오래도록 저물어간다

 

 


 

 

심인숙 시인 / 옛집을 지나며

 

 

다닥다닥 붙어앉은 다세대주택 속에 낯익은 창이 보인다

저곳엔 한때 상실이란 여자가 살았다

반지하로 내려앉은 안방창문을 가리느라 그녀가 붙여놓은 바닷속 물고기 스티커,

유유히 물밑을 헤엄쳐 다니던 아가미는 황톳빛 물방울을 내뱉고 있었다

지금 B101호는 예전 그대로 그늘에 잠겨 있다

아니다. 이런 것이 아니다

그때 저 집은 물속으로 가라앉던 그녀를 수평선 위로 끌어올리곤 하였다

어쩌다 숨어드는 햇살을 찾아 손에 쥐어주곤 하였다

 

컹컹, 짖으며 그녀의 집이 나를 불러 세우고 있다

화장실 창틈으로 먼지 쓴 나팔꽃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지하 계단으로 백열등 불빛이 언뜻 비치는 듯하다

주전자에선 결명자가 끓고 금방이라도 프라이팬에 올려진 김치 지짐이 냄새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초원슈퍼 앞을 지나다 돌아보니 앳된 그녀가 무언가를 사들고 옛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심인숙(沈仁淑) 시인

1957년 인천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졸업.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숭어' 당선, 2006년  ≪문학사상≫ 시부문 [파랑도에 빠지다] 외 4편으로 등단.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