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효 시인 / 가을에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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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시인 / 가을에
세상의 소리들이 잠들을 깨나보다
수런 수런 수런 수런 곳곳서 수런대는
이 가을 가득 채우는 소리들로 오나보다.
그 소리 이 계절에 왜 잠 깨어 수런대나
목숨이 완성될 때는 해지기 직전의 순간
짧지만 영원한 시간 이 계절에 만난다.
-《가람시학》 2022. 제13회
유자효 시인 / 동행
그 많은 여름과 겨울 그 많은 꿈과 좌절
우리 함께 나누며 건너왔느니 시간의 강
손잡고 마지막 여정 더 애틋한 동행길.
-《정형시학》 2023. 가을호
유자효 시인 / 인생의 봄을 맞은 아들에게
네 어미에게 들었다 “엄마,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지? 미칠 것만 같아” 얘야 봄은 그런 것이다 미어질 것 같은 가슴으로 삶은 망울을 맺는 것이지 엄마에게 물었다지 “엄마도 그래?” 엄마도 그랬었지 그러나 이제 엄마는 봄에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지 엄마는 여름을 사랑하지 그 더위의 왕성한 생명력과 푸름을 그리워하지 엄마는 오히려 가을에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지 싸늘한 바람이 대지를 적실 때 엄마의 가슴은 낙엽 한 올에도 “덜컹” 떨어지는 무게를 체중 가득히 느끼는 것이다 얘야 봄에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청춘(靑春)이라고 이름했겠니 계절에서 밀려나는 엄마가 보는 계절의 시작인 네가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잠 안 오는 밤에 내게 말하더구나
유자효 시인 / 북엇국
설악산으로 떠난 친구 찾아가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문을 미니 눈이 쌓여 문은 열리지 않고 방 안에 갇힌 채 친구가 끓여주던 북엇국 “난 북엇국 하난 잘 끓여”
으스대며 벽에 걸어 두었던 북어 한 마리 내려 잘게 뜯어 냄비 물에 넣고 끓인 뒤 파를 숭숭 썰어 넣고는 계란 하나 툭 깨서 넣어 넘치기 직전에 불에서 내려 후후 불며 나눠 먹던 북엇국
밤새 마신 술에 울렁이던 속이며 깨질 것 같던 머리도 은근하게 달래주던 설악의 친구가 끓여주던 북엇국 고단한 살림살이 맺힌 울분도 어루만져 풀어주던, 그 한 몸 말리고 말려
뼈까지 발라내져 마침내는 살점 점점이 뜯겨지고 끓여져 우리네 시름 달래주다니 우리네 아픔 만져주다니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 약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 도(道)
유자효 시인 / 추석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유자효 시인 / 우주의 시간
달이 밝은 밤이면 바다거북 암컷들은 해변으로 올라와 뒷발로 모래를 파서 구덩이에 알을 낳는다 어미가 해주는 일은 뒷발로 알에 모래를 덮어주는 것뿐이다 어미는 다시 바다로 가고 알에서 깨어난 바다거북 새끼는 모래를 비집고 나와 본능의 부름에 따라 바다로 간다 그 시간을 기다리던 갈매기며 바닷게들에게는 성찬의 시간 이렇게 태어난 바다거북 새끼 천 마리 가운데 고작 한 마리가 성체로 자라난다고 한다 우직해 보이는 이 방법으로 바다거북은 1억 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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