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유진 시인 / 아득한 거리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0. 12:24

유진 시인 / 아득한 거리

 

 

새벽이 붐비는 생선시장 건너편

고양이 울음이 세워진 차바퀴를 굴린다

 

생선가게 주인이 한 팔만 뻗으면 고무통에 던져질

파랗게 질린 눈, 토막 난 피 냄새를 물고 건너려다

놓쳐버린 길바닥을 향해

집요한 긴장을 조이는 어린 고양이에겐

생선머리 한 토막이

시동 걸리지 않는 4톤 트럭보다 더 무겁다

 

저 막막하고 아득한 거리

먹이를 붙든 것인지 먹이에 붙들린 것인지

 

서른두 살 비정규직 남자의 사무실

서랍 안의 사직서 봉투와 불끈 쥔 주먹 사이

그 막막하고 아득한 거리

 

 


 

 

유진 시인 / 가면假面

 

 

오래 병을 앓았다.

 

꽃 같은 이름표를 달고

이름에 걸맞는 얼굴을 쓰고

이름값만큼의 병을 앓았다

 

만들어 쓴 얼굴로

만들어 쓴 얼굴들과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맴돌았다

 

같은 방향 혹은 다른 방향으로

시간을 깁는 소용돌이 속에

손목에 채워진 어제는 바꿔 끼울 수 없고

 

남겨진 길목마다

핑계를 버리고 왔을지도 모를

내가 또렷이 남아 있는

여기까지

 

-시집 <척> 에서

 

 


 

 

유진 시인 / 족보族譜

 

 

진초록을 타닥타닥 구워대는

삼복염천三伏炎天의 정오 화단에서

호랑나비 한쌍이 교미중이다

 

가끔씩 암수를 확인하는 날갯짓

도라지 꽃대를 허공으로 쑥쑥 밀어 올리며

종교보다 거룩하게

예술보다 아름답게

 

모습과 모습을 바꿔 살던 억겁습생의

탑을 쌓고 있다

 

태산같이 짊어진 속박의 문서에

또 한 장

고결한 유전자를 기록하는 중이다

 

 


 

 

유진 시인 / 그 겨울, 풍경

 

 

동짓달 찬바람에 시간 헐거워진 마을

언제부터인가 까치울음 그치고

아득한 몽환 속에 홀로 겨울을 꿰메며

시름시름 야위어 가는 고향집

 

대숲 술렁이는 뒤꼍 산등성이로

오늘이또 지면

밤이슬에 젖은 달이

차가운 기왓장을 뒤적이며

낡아버린 옛 가풍을 줍는다

 

 


 

 

유진 시인 / 편견

 

 

 한동안 바다를 읽었다. 빛과 바람과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물결, 빛깔, 소리... 저 다변의 감정들을 넓고 푸른 바다라고 단정 지은 당신은 누구였지

 

 잘못 읽힌 바다, 깨지고 부서지는 굴욕과 기억의 편린들 둥둥 떠다니는 감정의 바다를 너 혹은 나라고 읽어도 될까

 읽고 읽어도 모를 사람, 읽고 읽어도 모를

 나를 잘라낸다

 눈을 자르고, 입을 자르고, 귀를 자르고, 몸통을 자르고

 다시 나를 퍼즐한다

 

 작은 물 자락이었다가, 너울파도였다가, 해일로 치솟은 산을 일시에 뭉개버리고 다만 넓고 푸른 바다라 일축해 버리고 은근슬쩍 낙천주의라 귀띔하는 당신을

 그저

 당신이라고 믿어도 될까

 

 


 

 

유진 시인 / 시 너머의 시

 

 

 시인이 되고 싶다는 내게

 시인 당선자가 보내준 계간지의 심사평을 읽는다

 

 새로운 시, 시 너머의 시, 낯설되 절실하고 또 뜨겁되 낯설며 신선하되 뜨거운 시, 기존의 시가 가진 문법과 언어들에서 탈피, 재기발랄한 언어들 속에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넉넉하고 날카로운 인식의 징후가 있고, 언어와 시각이 개인의 내면에만 폐쇄적으로 갇혀있지 않고 세상과 개인이 두루 열려 소통하고 있는 시, 구름과 나무와 바람과 빗방울이라는 전형적인 자연의 이미지들을 현대사회의 일상으로 끌어와서 부박하거나 남루한 삶의 편린들을 신선한 감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한 시, 염결한 삶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사유하는 태도, 거칠지만 힘 있는 자신 만의 개성을 가진 시. 소멸과 확장에 관해 사유하고, 언어를 장황하게 소비하지 않고 절제하면서 시의 구조를 단단하게 구축하고 현실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을 비교적 자유롭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시...

 

 아, 어쩌나 시 너머의 시...

 소화력 부족한 나는 시인은커녕 독자가 되기도 글렀구나 싶다

 

 


 

유진 시인

부산에서 출생. 호는 청우(晴羽). 신라대학교 음악대학 관현학과 졸업. 2003년 월간「조선문학」으로 시와 수필 등단. 시집 『참선일지』 『가버리는 것들과 떠나야하는 것들』 등. 조선시문학상, 국제문예교류협회상, 포항문화예술인상. 현, 선린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 전담. 부산 `포항시향(첼로)수석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