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희 시인 / 알함브라의 사랑 외 5편
|
정국희 시인 / 알함브라의 사랑 왕비의 내통을 지켜본 사이프러스 나무에선 열렬한 키스 냄새가 난다 그 냄새로 인해 왕에게 죽임당한 나무 위엔 갈치 떼의 지느러미들이 부대끼며 몰려가고 있다 너는 용서하겠다 왕비는 살려 두었으나 질투의 화신은 상대의 심장을 요구했다 회오리치던 칼은 비밀의 장소였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차 없이 피를 묻혔다
잠시 그 시절이 되어 불행의 무게를 느껴본다 잠을 자면서도 그리운 그런 사랑을 만나 박제된 나무 아래서 밀회를 들켜보고 싶은 마음 그 비밀한 그림자를 확장하여 그늘 속 키스를 훔치고 싶다 썩은 나무에 패인 미친 사랑을 훔쳐 흉흉한 소문을 완성하고 싶다
퇴폐적 관능으로 한 세기 전쯤의 나를 도모해 보는데 이쪽으로 오세요 무리 속에서 화창한 오후가 얼른 오라고 손짓한다
정국희 시인 / 베네치아엔 그가 살고 있다
그가 보고 싶어서 밤이 환했다 환한 기분으로 내린 공항은 어디든 비슷해서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지금 화창한 밤이고 그가 있는 곳은 어두운 대낮이다 그가 준 상자를 삐뚤게 달고 누구의 애인이 돼야 한다면 너의 애인이 될게 105번 프리웨이를 타고 405번을 갈아탄 뒤 집으로 왔다
그의 중력으로 밤이 돌았다 사방에서 물냄새가 났다 모든 것에 그를 복제해 놓고 수만 가지 표정을 읽는 동안 뒤뜰 센서가 번쩍 고양이 목덜미를 뚫고 지나갔다 그 소리에 잠 깬 귀신들이 무더기무더기 어둠의 질주를 조율했다
노르웨이 어느 늙은 작가처럼 주제에 깊이 함몰된 밤을 앉아 있다가 밤이 저렇게 상자처럼 접혀있었나? 그가 준 상자를 열었다 어둠의 입자가 가장자리부터 거룩해졌다
그가 비로소 가장 좋은 재질의 애인을 얻었다 내가 보고 싶은지 그가 사는 쪽에서 고양이 울음이 들렸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정국희 시인 / 세마춤 백색 동그라미다 묘지의 달빛 같은 찬란한 유령이고 무한으로 돌다가 돌아버린 혼령들의 언어다
슬며시 흘러드는 물결소리 한쪽으로만 돌아가는 창백한 숨결이 부르지 않았는데 빙그르르 내 속으로 들어온다 나를 입은 혼이 나를 돌리자 나는 제자리걸음으로 펄럭이는 한 장의 헝겊이 된다
한 발 한 발 돌릴 때마다 몸피는 하얗게 커지고, 숨소리는 파란 조각으로 떨어지는, 내 몸에서 나의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몇 겹 심장에 들어 있는 너를 그만 보고 만다 가려진 줄 알았는데
세상이 다 너였던 그 해 너는, 너무 멀리 있었다 겨울이 파랬다 나는 춥고 가파른 모서리를 얼마나 꽉 움켜쥐고 있었던가
나를 입은 그가 생소한 눈빛을 내리깔고 있다 빙글 등이 보이는 순간 나를 나눠가진 그를 뜯어내고 뛰쳐나왔다
종아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정국희 시인 / 구름을 읽다
아기 늑대를 찾는 어미 늑대의 울음이 늙은 나무들 사이로 퍼지고 있다. 산맥을 돌아 나오는 길에 새끼가 갑자기 사라졌다. 평소보다 구름이 많이 낀 날, 감쪽같이 사라지기에 좋은 날이다. 먼 별에서도 볼 수 있는 산꼭대기에는 구름이 끊임없이 돌아 오르고, 산을 붙들고 있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숲속으로 깊숙이 퍼지고 있다. 단호한 속도로 퍼지는 울음을 새들이 물고 날아간다. 단번에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서 단맛이 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돌아올 것을 발갛게 목젖 세워 알리고 있다. 먹구름이 숲을 뒤흔들어 울음을 걸러내고 있다. 절벽 아래로 사라지는 구름을 따라 모가지가 꺾였을지도 모를, 혹은 피 묻은 털을 깔고 풀썩 엎어져 있을지도 모를, 그곳엔 아직 살가죽을 말릴 바람의 채찍은 없을 게다. 분명 죽음이 죽음을 뚫고 다시 일어설 명당일지도 모른다. 천 개의 눈으로 산의 맥을 짚고 만 개의 다리로 길을 뚫는 법을 알려주었으니 허공을 지탱하여 어미를 찾을 것이다. 찾아서 어미 앞에 위태롭게 나타날 것이다. 사라지기에 딱 안성맞춤인 날, 지독한 단내를 물고 날아간 새들의 행방도 묘연하다.
-시집 『로스엔젤레스, 천사의 땅을 거처로 삼았다』(2019)
정국희 시인 / 원죄
건조한 바지가 절뚝거리며 내 옆을 걸어간다. 날카로운 공기에 시선을 집중시킨 채 보폭은 무겁게 혹은, 흔들흔들 긴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발 닳는 자리마다 점점이 떨어졌을 먹먹한 통증 다독다독 다스리며 걸어 다녔을까 간혹 다른 느낌으로 두 다리 성한 듯 걸어도 보았을까 죄의 곁에도 안 가본 것이 단지 태어났다는 원죄만으로 짜부러진 생 절뚝절뚝 싣고 다녔을 어긋진 두 다리 저 두 다리에 눈치 없는 눈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을 때마다 짧은 한 쪽 다리 무시로 늘려 보았을 내 동생의 뼈아픈 통증이 가슴을 세게 후려친다.
정국희 시인 /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노랠 불러야 겠다 현란한 몸놀림으로 다이나믹한 락을 해도 좋겠고 감칠맛 비음으로 샹송을 불러도 좋겠다 아니,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본견치마 살랑대는 가요도 좋으리
삶이 별것이더냐 막걸리 몇 대접 같은 세상살이 한평생 몸에 가락이나 담아 고단한 생들, 한됫박 흥겨움 덩실덩실 줄 수 있다면야 육자배긴들 어떻고 판소리면 어떠랴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기타 하나 덜렁 메고 구성진 목청 돋아 노랠 불러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