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영 시인 / c2의 상담시간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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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영 시인 / c2의 상담시간 아이는 머리를 감았는지 머리를 수건에 감싸고 앉아 있다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c의 입술에 집중한다 가족이 모두 모인 저녁 상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책을 읽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입술을 달가닥거렸으며 소리는 안전했다 다만 툭, 건드려 주는 것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지는 닫혀 있던 것이 툭 터지는 것 눈이 까만 아이도 입이 닫힌 아이도 질문을 쏟는 어른도 횡설수설 중언부언 까먹는 대답도 함께 해야 즐거운 저녁이 된다 저녁 상담은 가족이 다 모인다 포도송이를 허겁지겁 따먹는 아이는 쌍꺼풀이 없는 아이는 하나씩 두 개씩 한꺼번에 톡톡 씹지도 않고 포도를 따 먹는 아이는 배가 고파요 점심도 못 먹었었거든요 아이보다 큰 학교 가방이 책상 옆에 뒹굴고 아이는 계속 포도알을 따먹는다 나는 창문을 열고 동글동글 바람을 들여준다 땀으로 범벅된 머리카락이 시원해지도록 바람을 들여준다 씨도 같이 먹어요 허겁지겁 포도 한 송이가 사라졌다 씨까지 먹어 치운 아이가 웃는다 드디어 웃는다 삼킨 포도 씨앗을 삼키며 아이는 동글동글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을 포도알에 담아보세요 아이는 포도 한 송이를 눈 깜짝할 사이 해치웠다
유승영 시인 / 알러지 데이
오늘밤은 백만 송이 가시가 태어날 거예요 시스루와 스커트는 매일매일 짧아지고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이 가시에 찔려나가고 눈 내린 언덕에서는 신발을 벗어들고 가시 같은 아이젠을 신어야 해요
창문 없는 고시텔에서 건선의 피부가 자라납니다 머리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우리의 핏빛 우리의 핏방울
가시 같은 아이들이 자라납니다 사방이 가시인 가시밭에서 가시들과 맞장을 뜨고 있어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루 종일 하고 있어요 붉은 양귀비 밭에서 취했던 취기처럼 튕겨 나오는 밤알을 금은보화 다루듯 우리는,
쓰레기 집게가 이렇게 쓸모가 있다니 두 발을 모아 공손히 밤송이를 까다가 맨손이었다가 안전한, 안전장갑을 끼다가
호들갑스럽다가 긴 작대기로 후려쳤다가 가시투성이는 후두둑 날아와 내 몸을 박아댑니다
유승영 시인 / 스완네 집 쪽으로*
발톱을 깎은 내 잘못이 커요 수의를 입고 누운 모습조차도 믿지 않은 우리들은 사지가 틀어지고 형태를 잃어버린 후에야 아차 싶은 우리들은 몸이 못쓰게 되어 질 때 쯤 우리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죠 갈고리 모양으로 웅크렸다 펴기를 반복하는 너의 신분은 크샤트리야 올록볼록 단단해진 근육의 크샤트리야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고양이만 생각했어요 보아뱀에게 통째로 먹힌 게 분명해요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느라 잠을 잘 수 없었어요 밤마다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었어요
배와 배가 맞닿을 때 그 말랑한 감촉이 좋아 너의 까칠한 혀가 좋아
굳은살을 단단히 붙이고 자랑스럽게 돌아왔어요 순식간에 달아나서는 길과 길이 얽혀버렸고 여름계곡을 보더니 미친 듯이 달아났고 눈을 깜박거리는 것을 잃어버린 사내를 위해 오늘 아침은 따뜻한 토스트를 구워요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인정신> 2015년 여름호
유승영 시인 / 폭우
케논이 쏟아지고 둥글게 둥글게 빗방울이 올라가고 우산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고 나는 너를 모른다고 잡아떼고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출근길 경유통이 바닥나고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그래도 우리는 웃었다 깔깔깔
때 아닌 전화번호가 도로 한 가운데 쏟아지고 메일주소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지고 여러 개의 머리들이 빙빙 돌고 돌면서 모두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젖은 페달을 밟고 있는, 저 남자는 지금 경우 한 병만이 살 길이고
모든 소리들이 부딪히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우리는 두 개골을 지나 잘게 부서지는 조각들 쏟아지는 소리를 딛고 너에게로 건너가볼까 모든 나무들이 베어져 나가는,
유승영 시인 / 궁동 34번길
자다 말고 우린 주인집으로 갔다 꿈을 꾸다 말고 우린 비를 피해야 했다 주섬주섬 주인집으로 옮겨갔다 윤이 나는 청마루를 지나 모르는 이불을 덮고 꾸던 꿈을 마저 꾸기로 했다
월남치마를 입은 몸매가 좋은 주인집 아주머니 가끔씩 노란 바나나를 주었던 비가 새서 웃어주었던 아주머니 비가 새는 집에서 소꼽놀이처럼 살았다 오래된 나무를 한 번씩 오르내리면서 같은 공간 속 다른 꿈을 꾸었던 집
피워놓은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엄마는 자주 말했다 연탄불이 꺼질까 봐 언니는 조마조마했지만 나는 안 그랬다 절 밑의 문간방에서 몇 번의 여름을 지냈고 그 여자는 내가 봐 왔던 여자 중에 가장 빛났다 비가 새서 많이 웃어주었던 그 여자 우리는 가난하고 심심했고 심심해서 아름다웠던 집 날마다 비가 내리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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