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향 시인 / 허공이 피었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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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향 시인 / 허공이 피었다
밤하늘 속으로 우뚝 올라가는 아파트 거푸집 높이 높이 층층 벽과 창문을 만들며 콘크리트로 단단히 굳어가는 중이다 메시앙, 메이플 자이, 파라콘 에듀포레 단지의 이름은 무엇일까
누구 누구 머지않아 저 회색 시멘트 속으로 들어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창가에는 풋풋하게 피어오르는 화분을 놓을 거야 식탁에 가지런히 수저를 놓으며 사랑을 나누고, 그러나 느닷없는 아픔과 이별, 또 기다림과 만남 피고 지는 꽃 같은 사람살이를 위하여 하늘은 눈을 감고 한 켠을 내주는 것이지
우리 언제나 그토록 아득히 슬프거나 하더라도 잠시 마음 환해지라고 하얗고 얇은 꽃잎을 옮기며, 까마귀와 같이 울어대는 허공 아직은 핏빛 알몸의 꽃망울을 감싸듯
저 캄캄한 철근의 소굴울 자연은 허용한다 神의 이름으로 죽은 듯. 살아있는 우후죽순을 품어 안는 봄밤 공사 중인 아파트 몇 개 층에는 불을 켜지고 그래도 희미한 거푸집을 초승달과 별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조연향 시인 / 사과
무척 잘 못 되었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자중하겠습니다 번쩍번쩍 여기저기 카메라 불빛, 이리 밀리고 저리 당겨지며 넥타이와 양복이 다 풀어헤쳐 질 때 사과는 데굴데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내려갔다
누군가 툭 던지고 간 때 늦은 사과 하얗고 새빨간 겉과 속이 다른 언어 보이지 않는 곳 어디까지 피멍으로 쓸쓸히 굴러가고 있을까 과오의 씨앗을 오롯이 껴안은 채 홀로 부서져 간 사과라는 사과 우리가 받아들기 이전에 뭉개져 버릴 것 같은 사과 사과만이 사과의 진실을 알 것 같다
구치소행 차창에 매달린 카메라들이 멈칫 물러서고 뉴스 끝에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기상예보 화면이 찌지직 트릭을 일으킨다 태풍에 하얀 사과 꽃잎 천지사방 날아올라도 날씨는 죄가 없다
-《현대시학》2023. 3-4월호
조연향 시인 / 그늘 한 자락의 앵두
빈집에서도 열매는 잘 익었습니다 태풍이 휩쓸어 가도 소나기 물방울처럼 탱탱하게 매달린 앵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직 속을 달구고 있습니다 다 떨어져야 그 가지 새 꽃 피고 열매 맺는다니 이번 생의 애물, 기어이 따 버리자고 한 움큼씩 훑어도 손안에는 겨우 몇 알 나머지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정신없이 빨간빛에 홀려서 휘늘어진 가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바람도 고요히 떨어져 누운 앵두 그늘 한 자락이 꽃 피우듯 서늘하게 덮어 주고 있습니다 - 시집 <길 위에서의 질문> 에서
조연향 시인 / 서산 여자
저기 고비사막에서 구름처럼 낙지가 기어가네
지긋지긋한 바다가 사막에서 출렁거리네
꽃무늬 서산 여자는 굴을 따고 조개를 캐듯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막춤을 춘다
태양이 늘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는 듯, 단단한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 지평선, 신기루가 신기루로 가물거렸고 사막이 사막으로 보이는 내 정직한 가슴 속에서
모래가 회오리 춤을 추는데
서산 여자는 푸른 파도처럼 막춤을 춘다
-《시와소금》 2020. 여름호
조연향 시인 / 일식의 경계
구름 한장 너머 어디쯤서 생각 없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걸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것이 우리 필생의 업이지 늑대가 베어먹다 남긴 비스킷
당신의 진실은 부서지지 않고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터 산등성이 집들이 거북처럼 엎드려 있다 서로 가까이 두고도 얼마나 추위에 떨고 있었나
창문 흔드는 바람소리에 마음을 엎드렸나 영겁 속 내 몸이 통증으로 어두워지는지 빛과 그림자 둘이 아니라는 걸 지구 어느 부위에 文身을 새기는 걸까
하늘에서 땅까지 실루엣이 닫혀도 서로를 포갠 채 서로의 운명 갉아 먹어도 나는 당신과 절연 할 수 없다
달의 채전밭에는 포도가 흑점을 놓으며 쏠쏠히 익어가리라 무엇을 더 보려는가 눈앞의 세계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이다
나, 새끼거북처럼 등껍질 속에서 담장 밖의 세계를 향해 목을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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