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조연향 시인 / 허공이 피었다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0. 12:49

조연향 시인 / 허공이 피었다

 

 

밤하늘 속으로 우뚝 올라가는 아파트 거푸집

높이 높이 층층 벽과 창문을 만들며 콘크리트로 단단히 굳어가는 중이다

메시앙, 메이플 자이, 파라콘 에듀포레

단지의 이름은 무엇일까

 

누구 누구 머지않아

저 회색 시멘트 속으로 들어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창가에는 풋풋하게 피어오르는 화분을 놓을 거야

식탁에 가지런히 수저를 놓으며 사랑을 나누고,

그러나

느닷없는 아픔과 이별, 또 기다림과 만남

피고 지는

꽃 같은 사람살이를 위하여

하늘은 눈을 감고 한 켠을 내주는 것이지

 

우리 언제나

그토록 아득히 슬프거나 하더라도 잠시 마음 환해지라고

하얗고 얇은 꽃잎을 옮기며, 까마귀와 같이 울어대는 허공

아직은 핏빛 알몸의 꽃망울을 감싸듯

 

저 캄캄한 철근의 소굴울 자연은 허용한다

神의 이름으로

죽은 듯. 살아있는 우후죽순을 품어 안는 봄밤

공사 중인 아파트

몇 개 층에는 불을 켜지고

그래도 희미한 거푸집을

초승달과 별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조연향 시인 / 사과

 

 

무척 잘 못 되었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자중하겠습니다

번쩍번쩍 여기저기 카메라 불빛, 이리 밀리고 저리 당겨지며

넥타이와 양복이 다 풀어헤쳐 질 때

사과는 데굴데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내려갔다

 

누군가 툭 던지고 간

때 늦은 사과

하얗고 새빨간

겉과 속이 다른 언어

보이지 않는 곳 어디까지 피멍으로 쓸쓸히 굴러가고 있을까

과오의 씨앗을 오롯이 껴안은 채

홀로 부서져 간 사과라는 사과

우리가 받아들기 이전에 뭉개져 버릴 것 같은 사과

사과만이 사과의 진실을 알 것 같다

 

구치소행 차창에 매달린 카메라들이 멈칫 물러서고

뉴스 끝에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기상예보 화면이 찌지직 트릭을 일으킨다

태풍에 하얀 사과 꽃잎 천지사방 날아올라도 날씨는 죄가 없다

 

-《현대시학》2023. 3-4월호

 

 


 

 

조연향 시인 / 그늘 한 자락의 앵두

 

빈집에서도 열매는 잘 익었습니다

태풍이 휩쓸어 가도

소나기 물방울처럼 탱탱하게 매달린 앵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직 속을 달구고 있습니다

다 떨어져야

그 가지 새 꽃 피고 열매 맺는다니

이번 생의 애물, 기어이 따 버리자고

한 움큼씩 훑어도 손안에는 겨우 몇 알

나머지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정신없이 빨간빛에 홀려서

휘늘어진 가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바람도 고요히 떨어져 누운 앵두

그늘 한 자락이

꽃 피우듯 서늘하게 덮어 주고 있습니다

- 시집 <길 위에서의 질문> 에서

 

 


 

 

조연향 시인 / 서산 여자

 

 

저기 고비사막에서 구름처럼 낙지가 기어가네

 

지긋지긋한 바다가 사막에서 출렁거리네

 

꽃무늬 서산 여자는 굴을 따고 조개를 캐듯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막춤을 춘다

 

태양이 늘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는 듯, 단단한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 지평선, 신기루가 신기루로 가물거렸고

사막이 사막으로 보이는 내 정직한 가슴 속에서

 

모래가 회오리 춤을 추는데

 

서산 여자는 푸른 파도처럼 막춤을 춘다

 

-《시와소금》 2020. 여름호

 

 


 

 

조연향 시인 / 일식의 경계

 

 

구름 한장 너머 어디쯤서 생각 없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걸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것이 우리 필생의 업이지

늑대가 베어먹다 남긴 비스킷

 

당신의 진실은 부서지지 않고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터

산등성이 집들이 거북처럼 엎드려 있다

서로 가까이 두고도 얼마나 추위에 떨고 있었나

 

창문 흔드는 바람소리에 마음을 엎드렸나

영겁 속 내 몸이 통증으로 어두워지는지

빛과 그림자 둘이 아니라는 걸 지구 어느 부위에 文身을 새기는 걸까

 

하늘에서 땅까지 실루엣이 닫혀도

서로를 포갠 채 서로의 운명 갉아 먹어도

나는 당신과 절연 할 수 없다

 

달의 채전밭에는 포도가 흑점을 놓으며 쏠쏠히 익어가리라

무엇을 더 보려는가

눈앞의 세계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이다

 

나, 새끼거북처럼 등껍질 속에서 담장 밖의 세계를 향해 목을 뺀다

 

 


 

조연향 시인

경북 영천 출생,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과 박사. 199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와2000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제1초소 새들 날아가다』 『오목눈숲새 이야기』 『토네이토 딸기』 『길 위에서의 질문』 등. 연구서 『김소월 백석 민속성 연구』.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강사. 육군사관학교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