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송준영 시인 / 산 그림자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1. 13:30

송준영 시인 / 산 그림자

 

 

오랜 착각은 한 송이 봄꽃이 나임을 아는 것

그것이다 봄꽃 한 송이

이 턱없는 우리가

 

나임을 알거라

 

한 박자 한 곡조임을 알거라

봄바람향기

 

입에 씹힌다 나임을 알거라

 

 


 

 

송준영 시인 / 빔, 그 한쪽

 

 

꿈은 꿈이었다. 밤 내내

빈 뜨락에 진군하던 눈들도 잠들었다. 새벽녘 용두질하던

내 오줌 줄기가 흰 살집에 깊이 깊이

꽂힐 때, 은박지에 싸여서

은코끼리는 처녀설 위를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꾸 내딛는 밤 내내

용두질만 하고

 

 빈터에 은코끼리가 간다. 다리도 없이 긴 코와 보이지 않는 꼬리를 끌면서, 햇살 머무는 빈터에 발가숭이 눈이 허공을 향해 누워 있다. 반짝이는 은빛 코끼리, 손톱만한 애기 웃음들이 일시에 모였다가 흩어지곤 한다. 아니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등은 허공 위로 솟고, 다리는 땅 속에 깊이 박혀 시선 밖이다. 이것은 빔이다. 허공은 빔이다. 허공과 하늘은 글자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하늘을 허공이라 부른다. 하늘엔 물고기도 있다. 물고기 뱃살에는 눈부신 깃털을 달고 있다. 허공이 끄는 새털구름 몇 필. 하늘 면목이 보인다. 아니 얼굴을 내민다. 하늘엔 바람도 산다. 바람은 긴 긴 머리카락만 보여준다. 새털구름이 머리카락 채찍에 맞아떨어진다. 공은 빔과 더불어 낙화한다. 떨어져 닿는 밑바탕은 꿈이다. 꿈은 필요하다. 눈도 필요하다. 눈 위로 낙화하는 용두질의 빔, 빔뿐인 꿈은 어둡다, 밝다.

 

 


 

 

송준영 시인 / 나의 기쁜 듯 슬픈 날

 

 

나는 있다 우연히 있다 필연적으로 있다 나는 움직이나 가만히 있다 나는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을 나타내본 적이 없지만 나는 있다

 

거울 앞에 서면 나는 없고 거울만 있다 거울은 내 절친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이내 분사한다 가만히 있는 거울이 있듯이 가만히 있는 내가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본 적이 없다

 

나를 본적이 없기에 나는 있다 누가 있어 나를 보고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나는 누구인가 누군가 나를 보고 웃는다 이럴 땐 그건 나의 속 그림자다

 

나의 뒷면은 없다 거울의 뒷면도 없다 물론 거울이 깨어지면 꺼이꺼이 우는 여기에 내가 있다가도 없다 이렇게 기쁜 듯 슬픈 나는 텅 빈 천둥벌거숭이다

 

-계간 『시와세계』 2011년 여름호

 

 


 

 

송준영 시인 / 해제 법문

 

 

① 비틀거리며 시자에 부축되어 상당한 노승의 한 말씀이 있었다.

 

오늘은 삼동을 지나고 모두 흩어져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날이오. 여러 스님들의 공부 점검은 본사에 가서 큰스님들께 받고 이 산승은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소. 혹 가져갈 것이 있어도 모두 그냥 두고 가시오. 이 산승의 부탁은 여러분들이 산문을 나설 때, 이곳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알 은 것은 모두 놔두고 가시오. 만약 한 툴이라도 가져가는 스님이 있다면 도둑이오.

 

한참 앉아 졸던 노승이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하좌하였다.

 

 


 

 

송준영 시인 / 다시 해제일

 

 

② 한참 졸고 있던 노승이

주먹코를 훌쩍이며

새앙쥐 눈을 초롱이며 하좌하셨다.

 

오늘은 삼동을 지나고 모두 흩어져 본래자리로 돌아가는 날이오. 그 자리에 들거든 돌아 가 본사 큰스님을 한 번 감변해 보시오. 이 산승은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오. 혹 가져갈 것이 있으면 몽땅 들고 메고 지고 가시오. 이 산승의 부탁은 여러분들이 산문을 나설 때, 이곳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알은 것은 싹 가져가란 말이오. 만약 한 톨이라도 두고 가는 스님이 있다면 도둑이오. 깽 깽한 설악 노장이 상당하여 한 말씀이었다.

 

 


 

 

송준영 시인 / 조실스님 지금 주무십니다

 

 

이가 방광하여

끝이 가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 주십시오?

 

똑바로 가라.

오대산 방산굴

한 노인이 양지 녘에 조자앉아 이 버리고 계시네.

 

 


 

송준영 시인

1947년 경북 영주 출생. 법명 醉玄. 199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나』 『반야심경강론』 『습득』 『조실』이 있음. 2005년 제 6회 '박인환문학상'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 계간 <시와 세계> 발행인 및 주간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