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 시인 / 시쓰기 때려치우고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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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시인 / 시쓰기 때려치우고
시쓰기 그만 둘 때가 되었다 마음 더운 한 때 치고 빠지는 삥땅치기 인형 뽑기 꼼수 따위 핏대 올려봤자 구석 세상 특별한 정취 익히지 못하였고 많고 많은 말 진득이 담지 못하였거니 길게 공갈치고 엄살 부릴 일이 아니다 시원찮은 몸뚱어리 그나마 구르자고 애를 쓰고 눈두덩이며 콧등이며 덤덤한 때 이르렀으니 이도 한 경지에 이른 티가 아니겠는가?
험한 세월 비 사이로 피해 다니며 살피었으나 사랑의 바다 한없이 얕아 한 몸 실을 틈 보지 못하였고 정의의 높은 봉 아스라이 멀어 발 닿을 수 없었다 속 가리는 말재주로 한 심금(心琴) 타기 애초 그른 일 애먼 줄타기 말장난 핏대 올리기 따위 때려치워야 해 두루 알기란 거짓되고 끝없는 자유란 부자유로운 바 입은 세상 벗어던지고 다시 입고 벗어던지기 세상살이 질러가도 돌아가도 모르기 못 가기는 매 한 가지 다음 마을 다음 마을 덮었다 개어두고 새로 개고 뜨는 일
팔 빠진 애들 격투기 하듯 시 쓰기 손끝에서 너덜거릴 때 땡볕 안에 서니 비로소 전신이 서늘하다 때려치우고 나니 길고양이 싸움 소리에도 모른 척 잠 이룰 만하고 일일삼성 수신제가 아침저녁 목구멍에 헹구게 되었도다 불법에도 편법에도 그게 법일 터 얼추 길이 들었나니 콘크리트 수직터널 엘리베이터 그만 내려서 가야해, 손목에 새긴 시간, 사위(四圍)를 조는 장소를 벗고 가야 해, 조용히, 출세에서도 구원에서도 몸 빼내어
일 편 떼배 한 구석에 작은 짐 하나로 사뿐 앉아서 강 너머 상수리나무 언덕에 가 닿으리 매일 화관(花冠) 고쳐 쓰고 새로 온 물에 발 담그고 잘 마른 상수리 가죽 옷 해 입고 바람소리 냇물소리로 말하고 팔자걸음 걸으며 속없는 헛기침 쏟아내리라 용변기별 오면 허허 껄껄, 대충 돌아 서 보고 멧돼지 불러 밭고랑 갈고 수저 길이 서너 자 늘려 남의 입부터 돌보리
산다는 건 지나새나 입고 벗는 일 남 몰래 시 쓰기 시 쌓기 때려치우고 남 되도록 오늘 벗고 다음 마을 다음 마을 미리 당겨 새 잠자고 다시 개어 두고 가리
-《서정과현실》 2018. 상반기호
신진 시인 / 밤기차
마지막 밤기차 그대 있어서 혼자 앉아도 외롭지 않다. 처음 본 젊은이의 허리를 안고 잠든 노안(老顔)이 흉하지 않고 술 나누는 중년의 음담패설도 야하지 않다. 여자의 어깨에 기댄 남자 남자의 팔을 베고 잠든 여자가 천하지 않다 서울서 부산까지 차창에 가득한 어둠 그대 가까운 오늘은 자신이 선다 흐르는 은하수 물무늬마다 밴 얼굴 잠든 얼굴에서 음담패설에서 밤기차의 흔들리는 속도에서도 보이는 얼굴 앞자리의 청년아 너도 아침이 오는 걸 보려고 잠자지 않았느냐? 그렇구나, 네 어깨 너머 어둠이 겁을 내기 시작하고 내가 기다리던 풍경들 -산이 제 모습을 뽑아내기 시작하고 들이 배를 드러내며 기지개 켜고 보아라, 人家가 가까이 서로 가까이 모여드네 초하(初夏)의 산등성이나 주황쉐터의 들보다 이제 보니 청년아, 네가 아름다운 옷을 입었구나. 사람들 깨어나고 지칠 줄 모르는 욕찌기 서로의 새벽 담배에 서로 눈주름 짓다가 우리 모른 체 헤어지리라 그러나, 그대여 그대 있어서 이것이 우리 서로 알고 지내는 모양인 것을 헤어짐이 아님을 알겠구나.
신진 시인 / 사랑니를 뽑고
외롭게 무너지는 시간을 보았는가 홀로 남은 밤 고요히 제 가슴 쪼개어 내는 진흙제방의 향기 양귀비꽃 제 살을 찢는 신음소리 들어 보았는가. 오늘, 칫과의의 핀셋에 뿌리째 뽑혀난 후로도 끊임 없는 모반의 그 흰 이마 붉은 손톱 혼백은 생생하다. 나도 가고 싶다 사랑이 없는 곳으로 조용히 가슴을 열어 무너지는 어둠의 하얀 돛을 보고 싶다. 아픔이 아픔으로 확실하게 살아 남고 마취제도 지혈제도 치과의도 이름이 없는 미명(未明)의 땅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먹고 사는 일처럼 있으나마나한 땅 단지 그곳에 가고 싶다. 사랑니여, 안녕 만나는 시간에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 변덕의 당에서 스스로 내 가슴 헤쳐 내리며 북소리로 빨갛게 신음하고 싶구나.
신진 시인 / 유혹
이젠 오너라.
잠시 의자를 밀어 놓고 이름 있는 것들의 낭하를 건너 이젠 오너라.
올 때는 아무도 더하지 말고 강(江)만 보면서 오너라.
박달나무 방금 그른 산(山) 물을 산 채 마시고 한 열흘 나뭇잎처럼 흥청거리기도 하면서 기침하는 너의 간장(肝臟) 바람 쏘이고 가거라
열여섯 살 바람이 사는 골짜기 둥지마다 황금빛 날짐승 알이 동굴에는 김현(金現) 낭의 어진 아이가 햇볕 쬐고 있단다 햇볕 쪼이고 있단다
예서 한 열흘 음악이 되어서 놀다 가거라
이름 있는 것들의 낭하를 건너 이젠 오너라
⁎金現郞은 삼국유사 제5권 金現感虎에서 호랑이가 분신한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다.
- 1974년 첫 추천시
신진 시인 / 멀리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 당신을 생각하면 만상은 아름다운 꽃이 되지만 속은 달아나고 없습니다
차마 고개 수그릴 수 없는 땅에 나무에 박힌 빙과(氷菓)처럼 꽂히어 이별한 사람과 사라진 얼굴들의 싸늘한 엽서를 받으면서
하느님, 나는 당신을 불렀습니다
이름 없는 애드벌륜이 잠시 부풀고 사람들은 손을 들어 푸른 가지와 열매를 맺으면서 그러나, 사라져 갔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고음(高音)은 맑게도 울리지만 내 가슴에 고이지 못합니다 마른 손바닥 위에서 언제부턴가 개들이 짖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죽기 전에 쓴 엽서가 싸늘히 식어 내 가슴에 박쥐의 날개를 퍼득입니다
멀리 계시는 하느님 이제 당신께 바라올 일은 늘 부끄러운 나의 이름을 깊이 숨겨 주심입니다 오래 전 당신께서 단단한 못질로 나의 창문을 닫아 주시었듯이
- 1976 천료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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