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종훈 시인 / 텅빈충만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3. 12:42
김종훈 시인 / 텅빈충만

김종훈 시인 / 텅빈충만

 

 

하나의 문이 방향에 따라

입구가 되고 출구가 되듯

텅빔과 충만도 하나의 몸

 

그동안 나는

내 속에 너무 많은

것을 넣고 다녔구나.

 

정오를 넘어가는 시간이

작은 알밤 밀어내는

밤송이처럼

깊게 깊게  벌어지며

햇빛을을 마구 쏟아낸다.

 

텅비어서 꽉 차는

가을 저수지

 

 


 

 

김종훈 시인 / 냉장고

 

 

 어머니가 냉장고의 문을 연다 병들 잠시 떨린다 박카스와 소주 더러는 소주와 박카스 그 사이의 약병 가느다란 빛이 어머니의 표정을 위로할 때 옷자락 속으로 스며드는 냉기 이 집의 냉기는 쉽게 새지 않는다 오늘도 냉장고가 가정을 꾸려나간다

 

 어머니가 떤다 냉장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픈 심장을 꺼내 구석에 두면 허전한 표정은 오그라들고 얼어붙은 뚜껑을 녹이는 박동, 어머니 급히 약을 삼킨다 근육이 비로소 진정되자 밖에 서 있던 어머니 허물어진다 서서히 눕는다

 

 어머니 밖으로 나온다 다시 떨리는 병들 어머니는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고 더디게 줄어드는 약병 아버지가 소주를 꺼낸다 아들이 박카스를 마신다 더러 아들이 소주를 아버지가 박카스를 오늘도 어머니, 병들을 채워 넣는다

 

 


 

 

김종훈 시인 / 그들은 스스로 지구라고 부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등 푸른 생선

찬물에 헹군 뒤

아가미 밑에서 깊숙이 배를 따라 꼬리까지 가르자

짙푸른 등이 두 배로 넓어졌다

짙푸른 우주가 방 안에 펼쳐진다

노릿노릿하게 자글거린다

쌍둥이 행성인 양 눈깔은 서로 마주 보며 단단하게 익어간다

눈에 좋은 고등어의 눈깔은

서서히 굳어가는 저 눈깔은

심해의 유영을 잊어가는 저 난시의 눈깔을 헤집으면

먼 훗날 지구를 찾은 쌍둥이 행성의 외계인은 말할지 몰라

그들이 스스로 지구라고 부르는Green D-45행성에서는

아버지의 목을 쳤던 아들과 아들의 목을 쳤던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살았다고,

그들이 섬겼던 책에는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쓰여 있었다고

폭력을 증오하며 전쟁을 즐겼고

침묵으로 다스리다 침묵으로 귀환했다고

조심스럽게 뒤집어 가시를 발라

노릿한 살점을 헤집는다

어쩔 수 없이

 

 


 

 

김종훈 시인 / 부르카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김영미 피디가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 불을 지피고 밥을 짓는 거요

움막집이었고 찼다

아니, 미래에 하고 싶었던 꿈이 뭐냐고요

아침에 일어나 불을 지피고 밥을 짓는 거요

아니, 꿈이요 드림이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 불을 피우고 차를 끓이고 아침

준비를 해요

나흘 전 쌍둥이를 낳은 여성이

부르카 속에서 두 눈을 끔뻑이며 덧붙인다

아이 둘을 새벽 추위에 잃었어요

하나는 살기를 바랐는데

검은 눈동자가 아침빛에 오므라들었다

물을 기다리는 호스 주둥이처럼 요동치며

밤새 빨아들인 꿈을 쏟아냈다

 

 


 

 

김종훈 시인 / 아내가 가끔은 필요해

 

 

나는 아내가 없지만

아내가 가끔은 필요해

 

러닝구 차림으로 나란히 누워 자던 아내가

어둠 속에서 전등줄이 흔들린다고 속삭이면

어둠 속에서 큰 물체가 움직인다고 어깨를 흔들면

거미가 떨어지며 줄을 건든 것 같다고

안심시키지만

 

열린 창 틈으로 새 한 마리 들어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두 다리를 잡아도

가만있더니 창문 밖으로

비 오는 창문 밖으로 던질 땐

날개를 파닥거리며 깃털을 몇 개

안에다 떨어뜨린다

아내는 기특하다고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별들과 고요와 햇살뿐만 아니라

러닝구와 거미와 전등줄도

아내가 가끔은 필요해

 

우연과 비범과 상징이

함께 가슴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아

나랑 함께 사는 것 같아

나랑 함께 자고 깨는 것 같아

 

 


 

김종훈 시인

2006년 《창작과 비평》으로 평론,  2013년 《서정시학》으로 시 등단.  저서 『한국 근대 서정시의 기원과 형성』 『미래의 서정에게』 『정밀한 시 읽기』 등. 젊은평론가상 등 수상.